좀 더 영화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일단 단순하지만 내겐 흥미로운 연출 방법론이 있었다.

시거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항상 조금씩 크게 보인다는 점. 아주 작은 차이지만 화면에서 공간을 더 크게 차지하고 있음으로써 시거의 거대한 권력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하나는, 소설에서 냉정하고 간결한 문체를 영화로 옮기기 위해서 코엔은 최대한 영화적 기교나 테크닉을 숨기는 연출을 한 것 같다.

대화하는 씬을 보면, 카메라 움직임이나 이동을 많이 주지 않고 있다. , 액션이 들어가는 씬을 보더라도 동적으로 드러나는 연출보다는 정적인 연출을 하고 있다.

간결한 문체에는 간결한 연출.

 

내용적으로 더 보면, 단순히 시거는 을 대표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운명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시거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거나, 해를 미치지 않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꼭 동전 던지기를 한다. 앞면이거나 뒷면이거나 둘 중 하나. 50%의 운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자신을 위협하던 또 다른 킬러 웰스(우디 해럴슨)를 죽이기 전에 시거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다. “너가 따르는 규칙 때문에 이렇게 죽는 거다.”

시거는 카오스(혼돈). 시거의 우주에 질서, 규칙은 없다. 앞면 아니면 뒷면이라는 운명으로 점철된 무질서로 가득한 우주. 그런 시거의 카오스를 거스르는 웰스의 코스모스(질서). 그래서 저 말을 남기고 웰스를 죽인 게 아닐까.

 

또 다른 예로는, 시거를 만났지만 살아남은 두 명의 인물. 둘 다 운명(시거)에 순응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주유소 주인은 시거의 동전 내기 제안에 수긍하고, 맞췄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다음은 벨. 벨의 내레이션은 계속해서 작금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시거를 잡으려고 하지만 결국 벨은 스스로 시거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보안관을 그만두는 결심마저 하게 된다.


 

그는 젊었을 때 전쟁이라는 운명에 순응하고, 늙어서는 시거라는 운명에 또 한 번 순응하면서 혹 패배주의적 순응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어찌 개인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패배적이라기 보단 그저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순응자.

 

반면, 시거에게 죽은 인물들을 보자. 모스는 운명을 거슬러 돈 가방을 챙겼고, 모스의 부인 루엘린은 시거의 동전 내기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운명을 거스른 셈.

시거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차 사고라는 운명에 거스르지 않고 기꺼이(?) 부딪쳐 준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은 시거는 결국 살아남아 유유히 사라진다.

 

 

시거가 자연스러운 운명이라는 메타포는 물론 작의적인 나만의 해석일 수 있지만, 코맥 맥카시나 코엔의 텍스트들이 훌륭하고 풍부하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소설과 영화에서 가장 크게 차이를 준 부분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앞에 언급했는데, 모스의 부인 루엘린과 시거가 만나는 장면.

 

소설에서는 시거가 루엘린에게 동전 내기를 제안할 때, 루엘린이 처음엔 거절하다가 결국 그 제안에 수락해 내기를 하고 맞추지 못해 죽었다면, 영화에서의 루엘린은 끝까지 강한 신념으로 시거의 동전 내기 제안을 거절하다가 죽는 걸로 바뀌었다.

맥카시의 루엘린보다 코엔의 루엘린이 더 강인하게 그려진 셈.

 

 

코엔의 영화 속 남자는 대부분 멍청하고 약하지만 코엔은 그들을 애정 있게 바라본다면, 여자들은 다르다. 남자보다 더 똑똑하고 강하고 지혜롭게 나온다. 코엔이 실제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사건을 종결시키는 건 여자, 프란시스 맥도날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코엔이 코맥 맥카시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표현한 인물은 단 하나, 모스의 부인 루엘린. 코엔이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반증.

 

이 영화에서 돈 가방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다뤄진다. 모스가 돈 가방을 가져감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웰즈도, 시거도 이 돈 가방을 가져간 모스를 쫓는 것이 이야기의 큰 축이니까. 하지만 이야기 후반 돈 가방은 등장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시거가 돈 가방을 원래 주인에게 가져다주지만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빠지고 돈 가방은 아무런 의미를 갖게 되지 않는다.

 

, 이 영화의 주인공 모스가 죽는 부분이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다. (책에서도 똑같다) 시거와도 대등하게 총싸움을 벌일 만큼 대단한 모스지만, 멕시코 하수인들에게 총 맞아 죽는 부분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벨이 그 사건현장에 늦게 도착해서 모스의 시신을 보고, 사건 경위를 듣는 것 정도로 그의 죽음을 묘사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아마 많진 않을 것이다.

 

 

의미 없는 돈 가방도 ... 생략된 주인공의 죽음도 ... 어쩌면 허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지막 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8)

No Country for Old Men 
8.4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우디 해럴슨, 켈리 맥도널드
정보
스릴러 | 미국 | 122 분 | 200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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