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은 한없이 우울하다. 

주인공 아비의 인생과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겠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빈틈없는 미장센으로 인물들을 촬영해낸다.

 

영화속 인물들은 처음부터 건물안에 갇혀지낸다. 아니 어쩌면 아비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호를 받는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관념은 아비가 보호를 받는 동시에 갇혀지내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들은 건물에 갇혀지내기 때문에 햇빛에 완전히 노출되는 경우가 없다. 빛은 인물들은 완전히 밝게 비추지 않고 그들은 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공간에서만 존재한다.

사람의 내면에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 처럼 영화속 인물들을 촬영하는 방식은 완전히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비추지 않는다. 

건물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그림자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비정전에는 야외씬이 없을까?

 

어째서인지 야외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비가 내리거나 밤이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인물들은 철저하게 낮의 햇빛으로부터 소외된다.

인물들의 내면에 있는 어둠처럼 어딘가 자유롭지 못한 답답한 마음처럼 그렇게 영화의 미장센은 일관된 장면으로 디자인된다.

 

아비가 드디어 필리핀으로 친어머니를 찾아간 장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고 문전박대당한 그의 갈곳없는 분노와 실망감을 왕가위 감독은 이전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대낮의 야외씬으로 표현한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그림자속으로도 숨을 곳 없는 공간에 노출된 아비는 관객들에게 벌거벗겨진 기분으로 길을 걸어간다. 

자신이 버려진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있어도 거부하고 싶었던 그에게 이 문전박대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저 날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다리없는 새는 이제는 더이상 날아갈 의미도 살아갈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영화속에는 시계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인물들의 삶을 시간에 빚댄 미장센이다.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 공유하던 시간은 오후3시였으며 그 시간대를 루루에게 빼앗기고 만다. 영화속에서 루루가 몇시냐고 묻자 아비가 3시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이지만 왕가위 감독은 아비가 수리진과 함께였던 그 시간을 루루가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아비는 그 시간대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히 그 시간속에서 아비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수리진이나 자신의 삶에 맞추어 아비와 살아가려고 했던 루루역시 아비를 붙잡지 못한다.

 

그리고 경찰관과 수리진이 공유하는 시간은 밤이다. 밤 열시에 늘 공중전화 앞에 있을테니 전화하라던 경찰관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그에게 전화를 건 수리진. 하지만 경찰관은 이미 선원이 되었고 그들의 시간 역시 어긋난다.

 

영화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자신의 꿈을 꾸게 될거라고 한 다음날. 아비를 생각하며 한잠도 이루지 못한 수리진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 장면에서 시계는 의도적으로 바늘을 보여주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오후3시인 것을 어차피 알게 될 것이고 이 장면에서 미리 보여줘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왕가위 감독은 구태여 타이트한 프레이밍으로 시간을 감추어 놓는다. 

어째서일까? 마치 바늘이 없는 시계처럼 아비에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이렇게 좁고 답답한 미장센속에서 진행된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마음 한켠에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보았거나 또는 이제 보려고 검색을 통해 유입됐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엔 웬 쌩뚱맞은 고양이를 구하는 사건이라 적혀 있으니 조금은 당황스럽지 않은가?


영화에 고양이를 구하는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데 말이다.



고양이를 구하라라는 문구는 바로 이 시나리오 책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인데,

영화 초반에 주인공 캐릭터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배치한 사건을 가리켜 통칭하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무슨 이야기냐?


다니엘은 갑작스런 심장질환으로 당분간 일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되고 그래서 질병수당이라는 것을 신청한다.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계속 일을 할 의지가 있기 때문에 다니엘은 당연히 이 질병수당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다니엘의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감독이 할일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감독 켄 로치는 다니엘이 질병수당을 받을 수 없게끔 끊임 없이 방해한다.

아니 질병수당을 못받게 하고 구직 수당도 못받게 하고 다니엘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끊이 없이 방해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일인가?

적어도 영화안에서 비춰지는 모습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상식적인 사건을 만나는 주인공의 캐릭터는 어때야 할까?>


이 장면은 질병수당이 허사로 돌아가자 상담콜센터에 전화하지만 1시간 이상 대기만 하고 있던 중의 장면이다.


집앞으로 잠시 나온 다니엘은 개x을 치우지 않는 주민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바로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의 SAVE THE CAT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이야 말로 다니엘이 가진 중요한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다니엘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는 그저 모두가 규범을 지키고 살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이뤄지리라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으며 옆집에 사는 청년이나 위 장면의 무례한에게 인간으로서의 기본 예의를 지키라고 이야기 한다.


왜?


이런 인물이 부당한 일을 당해야 관객들이 더 빡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다니엘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벌어져도 영화의 스토리가 똑같이 흘러간다면? 

감독이 주인공 캐릭터 설정을 잘못한 것이다.

영화속 사건들은 오직 이 인물을 통해서 다뤄져야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 될 수 있도록 사건과 인물사이의 관게를 잘 구축해야 한다.



 

영화 500일 썸머는 처음부터 둘이 이별 할거란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러티브에서 클라이맥스는 무엇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실 500일동안의 이야기지만 썸머와 이별하는 것은 500일보다 훨씬더 이전이다.

 

500일에는 톰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부터 완전히 잊게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둘의 이별이 아닌 바로 위의 장면이다.

 

톰이 썸머를 잊어갈때쯤 다시 눈앞에 나타난 그녀와의 재회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를 배신하고

 

그녀가 청혼받은걸 알게 된다.

 

톰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잔인한 이 장면을 감독은 분할화면으로 기가막히게 표현한다.

 

 

<이 분할 장면이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완벽한 것이다.>

 

우선 분할에 들어가기전에 썸머의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가는 톰을 보자.

아.. 너무나 감옥같은 느낌이 아닌가? 톰은 또다시 썸머라는 감옥에 들어가지만 결국 이곳을 탈출하게 된다.

 

 

 

분할 장면은 상상부터 시작이 된다.

상상에서 먼저 문을 열자마자 키스하는 것을 보여주고 과연 현실은 어떨까? 라는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렇게 중간에 완벽하게 똑같은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톰의 기대가 아직은 남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물론 첫 장면은 기대와 달랐지만 앞으로는 기대와 현실이 같아지지 않을까 바라는 톰의 내면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내부가 이미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실 이 뒷부분도 같은 장면으로 분할이 되기 때문에 굳이 이 장면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약간 의아하긴 하지만 상상에서는 누군가 톰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는 따뜻한 느낌인 반면 현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톰은 그저 이 공간에서 완벽한 외부인일 뿐이다.

 

 

 

 

똑같은 책을 선물하고 똑같은 컷에서 시작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점점 멀어져간다.

책을 선물 받은 썸머의 반응샷의 사이즈 차이를 보라.

다른 장면이 아닌 다른 연출로 보여주는 분할 컷의 묘미 캬아

상상에서는 단둘이 대화를 하고 점점 가까워지지만 현실에서의 톰과 썸머는 아주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술을 마시게 된다. 결국 썸머로부터 완전히 내동댕이쳐직 되는 것이다. 물론 이 파티에서..

 

 

 

 

결국 이 분할을 끝내는 방식이 정말 압권이다.

혼자서 술을 마시던 톰.

상상에서는 둘이 은밀한 곳으로 가서 격렬한 키스를 나누지만 그 상상쪽을 바라보는 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상상으로 가려진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분할장면은 상상장면을 점점 밀어내고 그곳에는 약혼반지를 친구에게 자랑하는 썸머의 모습이 보여진다. 결국 이 분할을 밀어내는 연출로 인하여 톰의 상상은 완전히 종료된다.

 

 

이 영화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조로 되어 있다.

운명과 사랑을 믿는 톰과 그렇지 않은 썸머.

사랑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들.

기대와 현실.

분할장면이 이 영화에서 자주쓰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바로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조'의 철학 때문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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