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0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영화의 첫번째 씬 그 의미 <포미니츠,Vier Minuten>에서 영화의 첫번째 장면은 엄청나게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걸 영화 '귀없는 토끼'는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마치 영화의 첫장면을 누가 기억하냐?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소리만 지껄이면 될 것 같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시작하자 마자 아주 심오한 대사들이 나온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보여지는 빌딩위로 나오는 말은 '전에는 예술 영화만 했어요'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는 말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카메라는 그 빌딩안으로 들어가 등장인물을 찾아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대사들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 대사를 하는 위르겐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후에 벌어질 위르겐과 틸 슈바이거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복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굳이 빌딩 밖에서 부터 울려퍼지는 이 대사를 설정한 이유는 알수 없다. 처음부터 위르겐의 얼굴부터 나왔다면 어땠을까? 감독이 원한것이 그저 이후에 나올 위르겐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조금더 유예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위르겐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바로 틸 슈바이거가 하고 싶은 말일까?>

전에는 예술 영화만 했다. 감독이며 자신이 주인공인 틸 슈바이거가 이런 대사를 넣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일까? 사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예술부터 시작한다. 대체 왜그런지 모르겠지만. 특히 독일인인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보다도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문화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공부는 상당히 예술적인 경향으로 치우쳐져 있다.

이 영화 귀없는 토끼에서는 영화의 시작에 영화 내적인 의미를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후에 나오는 위르겐의 인터뷰 장면은 이후에 틸슈바이거를 엿먹이기 위한 그의 함정이었으며 그로 인해 나중에 슈바이거가 안나를 죄책감없이 그에게서 빼앗아 올수 있는 감정적 근거를 마련해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대사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첫장면의 경우 감독은 수많은 대사를 버릴 것을 각오하고 시나리오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영화의 첫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앞뒤 문맥상 이해하고 기억한다.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은 앞의 문맥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고전적 헐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에서는 항상 설정샷을 통한 많은 설명 이후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틸 슈바이거가 기자라는 것. 그리고 위르겐이라는 배우를 취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위르겐이 병신같이 성형 수술을 했다는 정보만 알려주면 된다. 하지만 위르겐의 성형 이야기는 영화가 시작되고 1~2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야기된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사실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설정한 장면이지만 앞에 관객들이 충분히 이들의 관계를 납득할 시간을 벌어줄 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대화에 틸 슈바이거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넣은 것이 아닐까? 아무튼 영화의 첫장면에 복선과 상징을 넣는 연출이 아니라 이렇게 수많은 대화로 이루어진 영화도 적지 않다.

관객에게 영화에 몰입할 시간을 주는 첫장면을 상징으로 할지 구체적인 정보로 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미쟝센. 의상으로 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배경으로 현장의 분위기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의 구도로 만드는 미쟝센이야 말로 진정 영화다운 스킬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애런과 로이의 다중인격이 사실상 연기였음 알게된 리차드 기어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그것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파격적인 촬영>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적인 촬영으로 되어있는 프라이멀 피어에서 가장 힘을 준것은 마지막 씬의 촬영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저 리차드 기어가 건물을 빠져나오는 이 여정을 영화는 가장 힘들여 표현하고 있다.

특히 위의 촬영 버즈 아이 뷰 (birds eye view?)로 촬영된 이 장면은 리차드 기어가 화면의 밑으로 지나가자 그것을 따라간다. 그리고 2번째 사진처럼 화면은 그를 거꾸로 보여주게 된다.

이것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리차드 기어의 뒤집어진 속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 나지만 억울하지만 누군가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그래서 영화는 이부분의 그를 이렇게 촬영한 것이다.

'마치 천장에 매달려서 걷는 기분'을 표현 한 것이다.
2009/04/12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음악을 이용한 감정조절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에서와는 정반대의 느낌 아닌가? 프라이멀 피어에서 위에서 찍어서 뒤로 돌아간다면 트레인스포팅은 밑에서 뒤로 돌아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상반된 구조.

<그리고 그의 고독함을 표현한다>

계속해서 머리위에서 촬영된 화면은 그냥 꼭대기에서 그를 따라간다.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은 하얀 바닥과 앙상한 나무 가지들 뿐. 그의 고독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고독함이라 표현하는 것이 조금 부적절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정신적 고독함이 충분히 느껴진다.

특히 한번 머리위에서 찍은 샷을 굳이 한번더 훨씬 멀리더 찍은 위의 두번째 사진을 보자. 개미만하게 나오는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가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도움을 청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서 선다. 그리고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영화는 끝난다. 걸어와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의 무력함을 표현 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하소연 하고 있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리차드 기어와 관객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에 멍하니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내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 '진실'을.. 자신이 배심원에게 잘못된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속아버린 이 진짜 '진실'을 그는 관객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앞모습을 보여주고는 그렇게 끝나 버린다.



소설에서 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영화에서도 적용하는 사례들이 있다. 소설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만 텍스트기 때문에 누군가의 시점에서 항상 서술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샷이 3인칭 시점으로 촬영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굳이 '관찰자'를 넣어서 그에게 영화의 주인공과 그의 삶을 보고 듣게 하는 것은 관객을 영화의 안으로 좀더 끌어 당기기 위해서다.

<사실 이 남자는 영화에서 거의 엑스트라 급이다>

영화에서 이렇게 주인공을 인터뷰하는 사람을 넣는 다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할 것이다. 보통 이러한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을 이사람에게 설명해서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끄집어 넣는다. 하지만 이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서는 다르다.

이 기자의 역할은 딱 중간까지다. 중간까지 이 남자가 이 영화에 나오는 이유는 바로 변호사인 리차드 기어의 캐릭터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이해 시키기 위해서다. 영화의 도입부인 위에서 변호사는 이런 말을 한다. '내게 있어서 진실이란 12명의 배심원드에게 내가 심어주는 인식'.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화는 계속해서 이 3인칭 관찰자를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맨처음에 말했던 이 '진실'에 대한 인식이 리차드 기어의 캐릭터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피고를 무고하다고 믿고 그를 돕기 위해 죽을똥 살똥 노력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끝으로 이 기자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이 남자는 리차드 기어에게 그가 말하는 '진실'과 변호를 하는 사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감독이 이 사람을 영화에 집어 넣은 것은 그것을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하지만 이렇게 알려준 이 변호사의 캐릭터야 말로 영화의 허무하고 화가나는 결말을 위한 완벽한 초석인 것이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솔직히 13년 된 영화를 지금에 와서 스포일러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영화는 처음부터 에드워드 노튼의 말에 따라 제 3자인 '진범'을 찾는 형식처럼 보여진다. 영화는 당연하지만 관객을 주인공인 리차드 기어가 변호하는 노튼의 편이 되게끔 유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가 무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리차드 기어가 진범을 찾아내어 그것을 밝히는 카타르시스의 영화라고 생각하며 보게된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밝혀지는 진실은 바로 에드워드 노튼이 '다중인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살인은 그의 또다른 자아가 저지른 것이었다.

관객은 이 새로운 사실에 영화적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영화의 방향은 새롭게 변모한다. 이제는 리차드 기어가 이것을 어떻게 법정에서 납득시켜 승리를 따내느냐이다. 그리고 역시 영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또 다시 한번 바껴 버린다. 마지막에 에드워드 노튼은 고백한다. 사실 다중인격 따위는 없고 자기가 처음부터 착한척 연기한 것이라고. 이 사실에 선량한 관객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순수하게 그를 돕고 싶었던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었던 리차드 기어를 매개체로 충격의 100센트를 바로 관객들이 흡수한다. 바로 이 충격적인 결말을 조금의 여과도 없이 아니 배가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리차드 기어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의 효과적인 구성을 위해 이 3인칭 관찰자인 '기자'를 배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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