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사극이라 부르는 역사극은 당연하거니와 지금 시대를 조금 거슬러 올라간 시대극에도 당시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남의 이야기도 마치 내가 본 풍경처럼 느껴지는 것.

 

 

 

옷차림은 오히려 주연급 배우들은 무난하다. 부자 선배야 워낙 명품을 입으니 시대를 안탄다 치지만 주인공 승민은 오히려 멋을 부리지 않아서일까?

오히려 같은과 친구보다 세련된 느낌이 든다.

 

 

 

코미디 영화가 아닌이상 주인공의 복장을 90년대 에쵸티 젝스키스 풍으로 할순 없지만 친구라면 다르다.

이 영화에서 납득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언행뿐 아니라 그 시대를 느끼며 웃음짓게 만드는 패션 센스에 있다.

 

깨알 같지만 두번째 사진 왼쪽에 붙은 비디오가게의 포스터를 보자 자세히 보면 브루스 윌리스라는 한글로 적힌 이름과 옛날 영화들이 잔뜩 붙어 있다.

 

이 영화는 이런식의 디테일한 부분을 꽤나 신경쓰고 있다. 이것은 물론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역시 주연 남녀의 패션은 지금의 대학생이라고 봐도 (촌스럽나?) 그건 아닌가?

아무튼 그래도 일단 확실히 완벽한 시대고증적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너무 촌스러우면 관객들이 오히려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두꺼비 소주와 대학교에 붙은 pc통신 무료강좌 후덜덜하다.

 

사실 이런류의 영화가 해야할 당연한 일이고 더구나 건축학개론이라는 제목인 만큼 주변 풍경에 많이 신경 쓴 모습이 보인다.

 

수지와 뒤에 선배가 입은 폴라티... 저런거 요새 안입잖음? 스티브 잡스형이 입던 스탈아님?

 

물론 영화에 따라서 이런 고증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이다.

완벽하게 똑같이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아니면 어느정도 판타지를 유지해 주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며 건축학개론은 꽤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납득이 같은 패션을 입은 승민과 S.E.S같은 패션과 염색머리 수지는 좀 아니지 않는가?

 

정확한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어느정도 판타지로 채운 것인지 궁금해진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이것은 시나리오의 문제와는 다르다. 시나리오의 그것이 이야기의 문제라면 영화는 이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것은 이런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 훌륭한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포스팅을 시작으로 영화 건축학개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씬은 굳이 필요한가?>

 

 

위의 장면이 건축학개론의 이른바 오프닝시퀀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재밌게 본 관객이 과연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 장면이 영화에서 꼭 필요할까? 라고 묻는 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장면은 왜 필요한지. 영화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 보자.

 

먼저 이 씬을 요약하면 어른이 된 양서연이 공사하다가 중지된 부모님의 집을 둘러본다.

그리고 지저분한 거실 바닥에 시멘트가 놓여있는 것과는 대조되게 그녀의 방(으로 추정되지?)은 마치 며칠전까지 사용하고 있었던 것 처럼 깨끗하다.

그리고 집을 살펴본 그녀가 떠나고 집의 외관이 멀리서 보이고 타이틀이 들어간다.

 

대사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이 장면이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재미있어 했을리가 없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장면을 나열하는 영화를 좋아해줄 정도로 대중은 멍청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사중인 집은 바로 현재의 양서연이다.

원래 영화에서 '집'이란 그 인물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내면이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느낌의 집에서 살 것이고 성공만을 바라며 냉철하게 살아온 사람의 집은 그것과 다를 것이다.

 

이 집은 양서연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부숴져있다.

영화의 시작지점에 그녀의 상태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는 아프고 꿈을 포기하고 했던 결혼은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그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친구였던 승민을 기억하고 찾아간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갑자기 승민을 떠올린 걸까?

그가 건축과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공사를 처음부터 그에게 맡겨도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고 정확히 무슨 이유로 승민을 떠올렸는지는 보여지지 않지만 이 집에서 혼자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된 방이 있다.

이 방이야 말로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고 서연은 자신의 옛 집을 둘러보다가 바로 그 방의 문을 열어본다. 방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그 때의 기억을 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방에 들어가보지는 않지만 이 방을 열어 보았다는 것이 승민을 떠올렸다고 생각된다.

 

뻥 뚫려있는 문을 통해 집으로는 들어가지만 닫혀 있던 자신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저 들여다 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위해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기억을 마주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어째서 이 방만 그때 그대로인가?

영화적 리얼리티로는 말도 안되는 책상에 포스트잍이 그대로 붙어 있는...

 

서연의 다른 삶은 그 이후로도 진행 되었고 그로 인해 좋던 나쁘던 변화했지만 승민과의 기억은 그 때 그대로 멈춰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때문에 그녀는 승민을 찾아갔고 자신이 인생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그와의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리고 서연은 집과 자신을 리모델링 시킨다>

 

 

이렇게 처음과 끝을 비교해보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제법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다.

엉망이었던 서연의 삶과 집이 원하는대로 예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혼을 했고 아픈 아버지를 모시며 살 수 있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집 역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영화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피아노 과외를 하는 장면을 보면 정확하게 맥락이 짚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승민이 보내온 택배를 받는다.

서연이 두고간 그것을 승민이 보내옴으로써 둘사이의 이야기가 모두 맞춰진다.

 

과거에 서연에게 그 선배가 없었다면 둘이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것처럼 현재 승민에게 약혼자가 없었다면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것이 이 둘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카메라는 오랜만에 씨디를 재생하며 음악을 듣는 서연을 비춰주다가 결국 그녀에게서 떠난다.

그녀의 삶이 안정됐다는걸 확인 시켜주고 승민에게서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관객에게도 그녀를 이제는 잊으라고 말한다. 



씨 인사이드 (2007)

The Sea Inside 
7.8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출연
하비에르 바르뎀, 벨렌 루에다, 롤라 두에냐스, 마벨 리베라, 셀소 부가요
정보
드라마 |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 125 분 | 2007-03-15
글쓴이 평점  





2009/09/09 - [영상문법] -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100분에서 2시간 정도 되는 러닝타임

그 시간동안 영화는 수많은 장면을 보여준다.

2시간을 끌고 가야할 영화의 첫씬과 마무리 짓는 마지막씬은 아무리 말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중요하다. 

영화 <씨 인사이드>에서 감독은 주인공을 어떻게 '보여주고'있는가?


암전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실제 스크린이 열리는 것처럼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목소리는 관객에세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렇다 이제부터 보여줄 영화의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하지 않으면 안될 이야기다. 결코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을 일이며 주인공의 내면으로 동조되기 쉽지 않은 스토리다. 


스크린이 열리고 보여진 바다 장면에서 폭우가 내리치며 창문장면으로 바뀐다. 우리는 나레이션의 그녀와 유사한 목소리의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한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관객에게 그 남자의 모습은 비춰지지 않는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이 첫 시퀀스에서 우리는 '남자의 시선'만을 보게된다.


영화가 첫씬에서 보여주어야할 주인공의 모습을 숨긴채 그렇게 감독은 주인공을 시선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바꾸어 놓는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주인공을 실컷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으며 격렬한 액션씬도 핸드헬드도 나오기 쉽지 않다. 앞으로 질리도록 볼 그 모습을 관객에게 잠시 숨겨둔다. 그로인해 우리는 그 인물에 더 집중하게 된다. 히치콕감독이 보여주는것보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라고 말한 것처럼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렇게 관객의 집중을 한몸에 받게 한 주인공을, 영화 내내 시선의 대상이 될 주인공을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만들지 않았다. 이제부터 실컷 구경거리가 되고 저 사람의 생각이 옳은가?하는 비판의 주인공이 될 그를 배려하고 있다.


그는 누워있다. 27년이라는 영화의 스토리 시간동안 누워있었으며 자살을 원한다.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주체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의 차원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의 첫씬은 그를 시선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표현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두고 관객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의 시선과 생각을 관객에게 들려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인물을 판단하게 하지마라 그것은 폭력적인 것이다. 주인공은 엄연히 살아있으며 스스로 무언가를 주장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인권이라는 이유로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이유로 다른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야 말로 폭력이며 인권을 침해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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