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2분이 넘는 롱테이크 장면이 계속된다.

겟 아웃 영화에는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롱테이크로 찍힌 장면이 없는데 왜 굳이 맨 처음 장면만 이렇게 찍었을까?

항상 이야기하지만 최소 몇십억 몇백억의 돈을 들여야하는 영화에서 첫 장면을 아무 생각 없이 찍는 감독은 없다. 특히 이렇게 특이하게 촬영된 장면이라면 더더욱 그 의미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남자는 천천히 달리아웃하던 카메라 안으로 프레임 인 한다.

영상 속에서 내가 설명했지만 프레임인(frame in)이라는 행위는 상당히 주도적이며 때로는 공격적이다.

이 롱테이크 장면을 해석하자면 백인들의 구역에 한 명의 흑인이 들어온다. (프레임 인)

백인들의 감시망에 들어온 이 흑인을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켜보고 감시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기절할 때까지 카메라는 커팅되지도 그가 프레임 아웃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기절하고 나서야 영화속 두 번째 컷이 등장한다. 

이것이 조던필 감독이 영화의 첫 장면을 2분이 넘는 동안 철저히 계산된 동선으로 단 하나의 쇼트로 촬영한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촬영의 의미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백인들의 감시의 눈>이라는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끊임없이 관객들을 불안하게 한다.

 

크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앞에 앤드류가 첫 등장할 때 처럼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빠지고 인물이 오른쪽에서 등장하는 것까지 똑같지만 크리스는 앤드류와 달리 프레임에 스스로 들어오지 않고 카메라의 이동에 의해 포착된다.

이것은 우연히 백인들의 감시망에 들어와 잡힌 앤드류의 경우와 로즈라는 사냥꾼을 밖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덫으로 끌어들인 백인들의 사냥 방식과 철저하게 맞아떨어진다. 

좋은 영화란 이렇게 내용에 맞는 영화의 형식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로즈의 집에 도착한 크리스를 멀리서 지켜보는 쇼트가 있다.

카메라가 다시한번 천천히 뒤로 빠지면 그들을 지켜보는 정원사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로써 관객들은 명확하게 카메라가 크리스를 감시하는 시선으로써의 역할을 한다고 느끼게 된다.

 

로즈의 집에 들어선 크리스의 모습을 아직도 이렇게 멀리서 따라갈 필요가 있었을까?

표정도 잘 안 보이는 사이즈로 굳이 그의 모습을 천천히 벽 뒤에서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은 다시 한번 집에 들어온 사냥감을 천천히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크리스가 2층으로 올라가자 저마다 대화를 나누던 백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조던 필 감독은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단서를 던진다. 

백인들은 끊임없이 크리스를 감시하고 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크리스의 강인한 육체를 살펴보고 그가 도망치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죽어가는 로즈의 시선 너머로 크리스가 멀리 사라져 가다가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백인들의 감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영화의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크리스.

 

그리고 이것은 영화 겟 아웃의 디렉터스 컷의 마지막 장면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백인들의 마을로부터 탈출하는 장면과는 다르게 원래 촬영된 장면에서는 그가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철창 너머의 철창과 복도 수많은 프레임 안에 갇히고 만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은 한없이 우울하다. 

주인공 아비의 인생과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겠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빈틈없는 미장센으로 인물들을 촬영해낸다.

 

영화속 인물들은 처음부터 건물안에 갇혀지낸다. 아니 어쩌면 아비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호를 받는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관념은 아비가 보호를 받는 동시에 갇혀지내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들은 건물에 갇혀지내기 때문에 햇빛에 완전히 노출되는 경우가 없다. 빛은 인물들은 완전히 밝게 비추지 않고 그들은 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공간에서만 존재한다.

사람의 내면에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 처럼 영화속 인물들을 촬영하는 방식은 완전히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비추지 않는다. 

건물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그림자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비정전에는 야외씬이 없을까?

 

어째서인지 야외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비가 내리거나 밤이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인물들은 철저하게 낮의 햇빛으로부터 소외된다.

인물들의 내면에 있는 어둠처럼 어딘가 자유롭지 못한 답답한 마음처럼 그렇게 영화의 미장센은 일관된 장면으로 디자인된다.

 

아비가 드디어 필리핀으로 친어머니를 찾아간 장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고 문전박대당한 그의 갈곳없는 분노와 실망감을 왕가위 감독은 이전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대낮의 야외씬으로 표현한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그림자속으로도 숨을 곳 없는 공간에 노출된 아비는 관객들에게 벌거벗겨진 기분으로 길을 걸어간다. 

자신이 버려진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있어도 거부하고 싶었던 그에게 이 문전박대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저 날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다리없는 새는 이제는 더이상 날아갈 의미도 살아갈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영화속에는 시계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인물들의 삶을 시간에 빚댄 미장센이다.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 공유하던 시간은 오후3시였으며 그 시간대를 루루에게 빼앗기고 만다. 영화속에서 루루가 몇시냐고 묻자 아비가 3시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이지만 왕가위 감독은 아비가 수리진과 함께였던 그 시간을 루루가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아비는 그 시간대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히 그 시간속에서 아비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수리진이나 자신의 삶에 맞추어 아비와 살아가려고 했던 루루역시 아비를 붙잡지 못한다.

 

그리고 경찰관과 수리진이 공유하는 시간은 밤이다. 밤 열시에 늘 공중전화 앞에 있을테니 전화하라던 경찰관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그에게 전화를 건 수리진. 하지만 경찰관은 이미 선원이 되었고 그들의 시간 역시 어긋난다.

 

영화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자신의 꿈을 꾸게 될거라고 한 다음날. 아비를 생각하며 한잠도 이루지 못한 수리진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 장면에서 시계는 의도적으로 바늘을 보여주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오후3시인 것을 어차피 알게 될 것이고 이 장면에서 미리 보여줘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왕가위 감독은 구태여 타이트한 프레이밍으로 시간을 감추어 놓는다. 

어째서일까? 마치 바늘이 없는 시계처럼 아비에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이렇게 좁고 답답한 미장센속에서 진행된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마음 한켠에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이것은 시나리오의 문제와는 다르다. 시나리오의 그것이 이야기의 문제라면 영화는 이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것은 이런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 훌륭한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포스팅을 시작으로 영화 건축학개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씬은 굳이 필요한가?>

 

 

위의 장면이 건축학개론의 이른바 오프닝시퀀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재밌게 본 관객이 과연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 장면이 영화에서 꼭 필요할까? 라고 묻는 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장면은 왜 필요한지. 영화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 보자.

 

먼저 이 씬을 요약하면 어른이 된 양서연이 공사하다가 중지된 부모님의 집을 둘러본다.

그리고 지저분한 거실 바닥에 시멘트가 놓여있는 것과는 대조되게 그녀의 방(으로 추정되지?)은 마치 며칠전까지 사용하고 있었던 것 처럼 깨끗하다.

그리고 집을 살펴본 그녀가 떠나고 집의 외관이 멀리서 보이고 타이틀이 들어간다.

 

대사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이 장면이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재미있어 했을리가 없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장면을 나열하는 영화를 좋아해줄 정도로 대중은 멍청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사중인 집은 바로 현재의 양서연이다.

원래 영화에서 '집'이란 그 인물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내면이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느낌의 집에서 살 것이고 성공만을 바라며 냉철하게 살아온 사람의 집은 그것과 다를 것이다.

 

이 집은 양서연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부숴져있다.

영화의 시작지점에 그녀의 상태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는 아프고 꿈을 포기하고 했던 결혼은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그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친구였던 승민을 기억하고 찾아간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갑자기 승민을 떠올린 걸까?

그가 건축과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공사를 처음부터 그에게 맡겨도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고 정확히 무슨 이유로 승민을 떠올렸는지는 보여지지 않지만 이 집에서 혼자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된 방이 있다.

이 방이야 말로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고 서연은 자신의 옛 집을 둘러보다가 바로 그 방의 문을 열어본다. 방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그 때의 기억을 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방에 들어가보지는 않지만 이 방을 열어 보았다는 것이 승민을 떠올렸다고 생각된다.

 

뻥 뚫려있는 문을 통해 집으로는 들어가지만 닫혀 있던 자신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저 들여다 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위해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기억을 마주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어째서 이 방만 그때 그대로인가?

영화적 리얼리티로는 말도 안되는 책상에 포스트잍이 그대로 붙어 있는...

 

서연의 다른 삶은 그 이후로도 진행 되었고 그로 인해 좋던 나쁘던 변화했지만 승민과의 기억은 그 때 그대로 멈춰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때문에 그녀는 승민을 찾아갔고 자신이 인생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그와의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리고 서연은 집과 자신을 리모델링 시킨다>

 

 

이렇게 처음과 끝을 비교해보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제법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다.

엉망이었던 서연의 삶과 집이 원하는대로 예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혼을 했고 아픈 아버지를 모시며 살 수 있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집 역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영화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피아노 과외를 하는 장면을 보면 정확하게 맥락이 짚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승민이 보내온 택배를 받는다.

서연이 두고간 그것을 승민이 보내옴으로써 둘사이의 이야기가 모두 맞춰진다.

 

과거에 서연에게 그 선배가 없었다면 둘이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것처럼 현재 승민에게 약혼자가 없었다면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것이 이 둘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카메라는 오랜만에 씨디를 재생하며 음악을 듣는 서연을 비춰주다가 결국 그녀에게서 떠난다.

그녀의 삶이 안정됐다는걸 확인 시켜주고 승민에게서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관객에게도 그녀를 이제는 잊으라고 말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