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인데도 하나와 앨리스에서 아오이 유우의 이름을 앨리스다. 2009/01/05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카드에 담긴 메타포 <하나와 앨리스>에서 이야기 한대로 그녀의 이름의 이유는 그녀의 캐릭터 설정에 있다.

조제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녀의 이름은 쿠미코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츠네오가 사다준 속편 그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조제'다>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 그녀가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사강'의 속편. 어째서인지 속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리질 않아서 조제는 책을 구할수가 없었다.

츠네오는 서점에 가서 알아본뒤 절판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헌책방에가서 그 책을 구해온다.

<조제는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 가발까지 쓰고 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축구나 야구 중계를 볼때 가끔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는 사람이 있다. 물론 집에서.. 여기에서 조제의 기분이 그런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 말하고 여주인공이 '조제'인 책을 읽으며 그녀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머리 가발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어째서 조제는 자신을 조제라 부르고 가발까지 써가면서 책을 읽는가?

<책속의 조제가 가진 여기저기 상처입은 토끼인형을 보자>

츠네오가 처음 조제의 집에 간날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경에 여기저기 꿰매어진 토끼 인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윗사진처럼 조제가 자신을 동일시한 책의 여주인공이 가진 토끼 인형과 똑같다.

아마도 조제는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 하기 위해서 멀쩡한 토끼인형을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조제가 되길 원하는가?

내 개인적인 해석으로 이 책이 너무 훌륭했다거나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어서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조제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절박하고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중에서 속편을 도무지 구할 수 없었던 책.

다른 책들은 외울정도로 지겹게 봤지만 속편을 구할수 없었던 조제의 이야기는 스스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속에서 자연스레 쿠미코와 조제를 합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조제라고 불리길 원하고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멀쩡한 토끼인형을 다 떨어져서 헝겊을 덧댄것처럼 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쿠미코'의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갈망은 아마 츠네오에 대한 마음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내가 얼마전 '큐피드의 장난'이라는 일본 만화책을 봤다. 거기에 보면 남자를 거의 사겨보지 않은 여성이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성관계 이후에 자신이 그저 외로웠을 뿐이고 20살이 되도록 남자한번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자신에게 접근한 주인공을 사랑하게 됐노라고 고백한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사람의 현실은 이렇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맞는 사랑을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조제에게 평생 남자는 없었다. 츠네오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츠네오는 조제가 알게된 첫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녀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지만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란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츠네오를 거부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랑'을 하게된 유일한 사람이다. 조제는 이 가질수 없는 '사랑의 경험'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녀는 츠네오가 언젠가 자신을 떠날 것을 알지만 현재를 살아간다. 츠네오와의 사랑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언젠가 츠네오가 떠날때 까지.

그녀가 가지지 못해서 열망했던 '책의 속편'처럼 츠네오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츠네오는 속편을 구해다줬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조제는 이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버림받더라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유명한 이누도 잇신 감독은 언제나 3인칭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조제 호랑이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카메라 앵글의 선택은 굉장히 많은 부분이 3인칭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시점샷들이 그의 영화에서 많은 힘과 느낌을 실어준다.

메종드히미코는 게이와 게이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3인칭 시점을 선택한다. 주인공은 게이가 아닌 여주인공이지만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 람은 게이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는 게이가 아닌 주인공이 게이들을 같은 사람으로 호감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친구는 될 수 있으니까.
당신은 당신의 주변 사람 모두를 이해한다고 믿는가? 그럴 필요 없다. 이해하는 것은 당신의 연인, 가족이면 충분하다 보통의 친구들은 꼭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영화 메종 드 히미코에서 여주인공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그저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관객에게 그저 주변에서 살펴보게 한다.

<대화씬인데도 굳이 차 밖에서 찍는다>

영화의 초반 오다기리 죠는 여주인공을 설득하러 온다. 아니 설득이라기 보다는 회유라고 해야겠다.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만든 게이양로원 메종드히미코에 그녀를 초대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오다기리 죠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를 위해 딸을 회유하러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관객에게 차 밖에서 들려준다. 그녀의 시점도 그의 시점도 아닌 그저 제 3자가 듣는 것처럼... 오다기리 죠가 그녀를 회유하러 온것을 그저 우리에게 알려준다.

<단 한번 차 안으로 들어가는 샷이다>

딱 한번 차안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얼굴과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다기리 죠가 들고온 양로원의 팜플렛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게이바 '히미코'와 연관지을 수 있는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꽤나 노골적으로 카메라 바로 앞에 3이라는 숫자를 손가락으로 세어보인다.

조금 여담으로 이야기 하자면 담배를 쥐고 있는 오른손과 3을 가리키는 왼손이 저렇게 한 화면에 들어오려면 왼손을 상당히 몸에 밀착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에게 3을 가리키려면 그런 자세로는 안된다. 오다기리 죠 쪽으로 시선을 전혀 돌리지 않는 그녀를 위해 손가락은 자동차 앞으로 훨씬 나갔어야 한다. 이 3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관객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오다기리 죠와 그녀는 서로 이야기 하기 보다는 그저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대화를 하고 있다. 때문에 감독은 저렇게 노골적으로 카메라 앞에 3을 가리키는 왼손을 배치한 것이다.

<이것도 시점샷이 아니다>

오다기리 죠가 그녀의 동료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사무실의 2층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창문 너머로 몰래 그들을 엿보고 있는 그녀와 전무의 모습이 보여진다.

순간적으로 이것을 여주인공의 시점샷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촬영된다. 자동차 안에서 봤다면 차의 앞유리를 거쳐서 봐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가 오기 때문에 화면에서 잘 볼수 있도록 차밖에서 찍은 것이라고 설명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샷 역시 그녀의 감정이 아닌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관객의 시점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료와 전무의 에로씬은 그저 배경이 된다>

이 장면이 정말 기가 막히다. 오다기리 죠와 여주인공의 대화는 계속 들려오고 (이것은 대사가 들려오고 다른 장소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 될수도 있겠다) 창을 안보이게 덮어버린 동료와 전무는 갑자기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달리인을 하는 카메라는 전무와 그녀를 화면 한쪽으로 버려버리고 창문 밖의 대화를 향해서 달려간다. 이들의 에로씬은 그저 관계를 설정하는 하나의 배경일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계속해서 관객들이 이들의 대화에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게이 영화이기에 감독은 신중하게 3인칭을 선택한다. 여주인공의 시점이나 게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했다가는 편협한 시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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