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미지로 설득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지의 생략을 통해서도 같은 것을 시도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스토리가 아닌 쌩뚱맞은 이미지로 표현한 씬이 있다
바로 위에 클립해 놓은 장면이다

<창녀의 삶이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혼을 하려다 실패하고 나니 살이 찌고 일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당연히 돈은 없어지고 남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한다
결혼에 실패한 미스후에게서 또다른 남자가 떠나가는 장면이다

그녀의 몰락은 이미 관객들에겐 예견된 일이다

<도도하게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이 점점 줄어드는 이야기 대신에 45초 가량 미스 후가 카메라를 쳐다보는 이미지가 삽입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처음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녀는 곧 고개를 들고 카메라를 도도하게 쳐다본다
턱을 높이 들고 카메라를 내리깔아서 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아직 자신감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곧 풀이 죽는다>

마지막에 그녀는 결국 조금 풀이 죽는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턱을 높이 들었지만 세상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았다

이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씬에서는 그녀가 사치가 너무 심해서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샤오장과 마스터의 대화를 통해 전해진다

결국 왕가위는 그녀가 돈이 다 떨어져서 빚을 지게 되는 과정을 이 한컷의 이미지를 통해서 표현한 것이다
어디인지 알수 없는 배경에 아직도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높이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그녀의 삶의 한 과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뻔한 이야기는 굳이 정보의 전달로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전달하려는 왕가위의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많은 빚을 지게 되는 과정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생략하고 무너져가는 그녀의 표정을 이미지로 보여주면 어떨가 생각한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쌩뚱맞은 장면이지만 45초나 되는 이 단 한컷이 결코 지루하다거나 대체 뭐지?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이미지가 나가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무너져가는 그녀의 삶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그녀의 삶을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잠깐 스토리를 쉬고 눈길을 카메라를 통해 보낸다

그리고 이 장면은 2009/03/14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슬로우모션 <에로스 - 왕가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다
그녀의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캐치하게 해주기 위해서인지 전체적으로 슬픈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의 슬로모션 역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녀가 빚을 지는 시기가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줘도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상징적인 연출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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