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캐릭터와 스토리에 엄청나게 많은 메타포를 심은 영화이지만 지금 소개 할 것은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이별장면의 반어법이다

 

어떻게 이렇게 찍을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는 이 장면은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직후 츠마부키 사토시의 '그후로 몇개월을 더 만났다'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보여진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하는 그둘을 보며 관객들에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슬프지 않다라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별장면에서 그들은 야한책을 건네 받으며 웃음을 띈다>


조제를 두고 혼자 나서는 츠마부키의 나레이션이 헤어진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나서는 츠마부키 사토시>

하지만 이 모든것은 반어법이었다

우에노 쥬리와 걸어가던 츠마부키 사토시는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이 조제를 버린거라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이별장면에서 누가 감히 눈물한방울 안보여주고 헤어진 이유와 과정을 설명하지 않은채 마지막에 이렇게 쌩뚱맞게 찍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영화가 큰 사랑을 받았던 것에는 나는 이 압축과 반어법이 크게 작용해다고 믿는다

스릴러의 거장 히치콕은 때로는 보이는것보다 보이지 않는것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드러내는 것보다 보이는 것보다 드러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슬프고 가슴아플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츠마부키 사토시를 떠나보내는 조제의 찢어지는 감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감히 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를 떠나는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츠마부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저 슬프지 않은것 처럼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그렇게 이별을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이별장면의 완벽한 반어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중간에 몇개월을 더 만났다는 이야기의 압축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영화에는 조제와 사토시가 이별하기 까지 다투고 상처주고 서로의 사랑이 변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갑자기 이별장면을 과감하게 보여주는데 이러한 압축을 통해서 2가지의 효과를 나타낸다

 

첫번째로 헤어진 연인과의 아름다운 기억만 간직 되듯이 마치 그렇게 조제의 가슴에 남을 것 같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츠마부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언제나 죄책감이 남아 있을수도 있다

나중에라도 그녀를 혼자두고 그렇게 떠난것을 자책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 조제는 어떤가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하고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하고 혼자서 살아갈수 있는 힘을 준 츠마부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만 간직하게 하고 싶었을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과감히 그들의 이별까지의 여정을 압축한다

 

두번째 효과는 그들의 헤어진 이유데 대한 설명이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이별하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영화를 결말지어야 하는가는 감독에게 큰 문제이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다

모든 관객이 둘이 제발 헤어지지 말라고 빌며 영화를 본다

그것은 관객들은 둘이 헤어질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고 츠마부키 사토가 자신이 조제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관객들은 그들의 이별의 이유를 충분히 알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별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 보다도 오히려 간단하게 파악할수 있는 그들 사이의 원론적인 문제인 것이다

 

물론 감독은 그들을 이별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제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조제의 인생이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별후에 묵묵히 장을 보고 혼자서 식사준비를 하는 조제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이유라고 생각한다

 

과감히 이별의 여정을 압축해서 건너뛰고 그 직후 반어법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누도 잇신 감독은 이영화의 결말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지만 그럴수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씨네마틱에 기사화된 글입니다>




일본영화인데도 하나와 앨리스에서 아오이 유우의 이름을 앨리스다. 2009/01/05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카드에 담긴 메타포 <하나와 앨리스>에서 이야기 한대로 그녀의 이름의 이유는 그녀의 캐릭터 설정에 있다.

조제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녀의 이름은 쿠미코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츠네오가 사다준 속편 그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조제'다>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 그녀가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사강'의 속편. 어째서인지 속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리질 않아서 조제는 책을 구할수가 없었다.

츠네오는 서점에 가서 알아본뒤 절판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헌책방에가서 그 책을 구해온다.

<조제는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 가발까지 쓰고 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축구나 야구 중계를 볼때 가끔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는 사람이 있다. 물론 집에서.. 여기에서 조제의 기분이 그런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 말하고 여주인공이 '조제'인 책을 읽으며 그녀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머리 가발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어째서 조제는 자신을 조제라 부르고 가발까지 써가면서 책을 읽는가?

<책속의 조제가 가진 여기저기 상처입은 토끼인형을 보자>

츠네오가 처음 조제의 집에 간날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경에 여기저기 꿰매어진 토끼 인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윗사진처럼 조제가 자신을 동일시한 책의 여주인공이 가진 토끼 인형과 똑같다.

아마도 조제는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 하기 위해서 멀쩡한 토끼인형을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조제가 되길 원하는가?

내 개인적인 해석으로 이 책이 너무 훌륭했다거나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어서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조제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절박하고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중에서 속편을 도무지 구할 수 없었던 책.

다른 책들은 외울정도로 지겹게 봤지만 속편을 구할수 없었던 조제의 이야기는 스스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속에서 자연스레 쿠미코와 조제를 합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조제라고 불리길 원하고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멀쩡한 토끼인형을 다 떨어져서 헝겊을 덧댄것처럼 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쿠미코'의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갈망은 아마 츠네오에 대한 마음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내가 얼마전 '큐피드의 장난'이라는 일본 만화책을 봤다. 거기에 보면 남자를 거의 사겨보지 않은 여성이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성관계 이후에 자신이 그저 외로웠을 뿐이고 20살이 되도록 남자한번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자신에게 접근한 주인공을 사랑하게 됐노라고 고백한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사람의 현실은 이렇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맞는 사랑을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조제에게 평생 남자는 없었다. 츠네오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츠네오는 조제가 알게된 첫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녀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지만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란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츠네오를 거부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랑'을 하게된 유일한 사람이다. 조제는 이 가질수 없는 '사랑의 경험'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녀는 츠네오가 언젠가 자신을 떠날 것을 알지만 현재를 살아간다. 츠네오와의 사랑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언젠가 츠네오가 떠날때 까지.

그녀가 가지지 못해서 열망했던 '책의 속편'처럼 츠네오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츠네오는 속편을 구해다줬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조제는 이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버림받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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