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는 분명히 편집기법이라 불리우지만 사실 꼭 그렇게 말할 수 만은 없다고 본다. 처음부터 의도대로 촬영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몽타주를 배우는 사자상이 일어나는 장면도 다른 장소에 가서 굳이 촬영을 해왔기 때문에 몽타주가 되는 것이 아닌가?

2009/09/13 - [영상문법] - 접속사 - <포미니츠, Vier Minuten>를 참고 하도록 하자.

이번에 소개할 장면은 오대수가 여성의 무릎과 종소리를 듣고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장면이다. 즉, 플래쉬 백이라고 볼수 있는 장면이지만 과거의 그곳에 오대수를 데려다 놓는 역할로 영화에서는 쓰여진다.

<미용실에 들어와 무릎을 보여주는 이 여성도 '윤진서'다>



위의 두장의 그림을 보면 윤진서가 미용실에 들어와 오대수에게 무릎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이 닫히며 나는 딸랑거리는 소리가 과거의 윤진서(극중이름  까먹었음)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의 벨소리와 그녀의 무릎을 통해 플래쉬백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는 문과 자전거의 소리가 하나로 녹음된 것으로(아닌가?) 동음이다. 아무튼 이 사운드를 통해 영화는 자연스럽게 플래쉬백으로 들어간다.

어째서 박찬욱 감독은 상큼하게 딸랑 거리는 소리만을 통해 과거로 연결하지 않았을까? 미용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윤진서가 들어오는 순간의 종소리만을 듣고 과거로 연결했어도 그걸보고 관객들이 '뭘 저렇게 쉽게 생각해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오대수가 이우진의 말처럼 남의 일이라고 완전 잊어 버렸던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과도한 설정  때문에 '무릎'이라는 불필요한 연출이 과도하게 노출된다. 오대수는 계속해서 미용실 아주머니의 무릎을 훔쳐보고 굳이 그때 들어오는 윤진서의 무릎을 보다가 소리를 듣고 과거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 불필요한 것은 어떤 의도일까? 굳이 사운드만으로 충분했는데 이 '무릎'을 넣었다는 것은 오대수의 캐릭터를 더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든다. 과거의 오대수가 윤진서를 쳐다 봤을때 그녀의 다리를 보며 약간의 음흉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어린 오대수의 캐릭터 이며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의 사건의 출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미용실에 들어오는 여성을 동일인물인 윤진서로 배치한것은 참 재미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그녀는 신인이었고 잠깐 나오는 이 컷에서 그녀를 보고 플래쉬백에 나오는 그녀와 같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를 두번 보는 관객들을 위한 영화 외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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