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보인다. 화면에 COPACABANA라는 클럽이 보이고 그 밑으로 자막으로 New York City 1962라고 쓰여있다.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재밌는 점은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해방 선언을 한 것이 1863년 1월 1일로부터 정확하게 100년이 지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있다 즉 1962년의 12월 끝자락이라는 이야기다.

 

미국은 1861년부터 4년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을 치렀다.

그림에서 왼쪽에 미국의 국기가 보인다. 이것은 당시 북부군이 미국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남부연합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며 새로운 깃발을 내걸고 싸운 것이다.

이 전쟁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대부분 노예제도를 둘러싼 싸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미국 북부는 공업화가 진행되어 흑인이 노예보다는 임금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노예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북부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법과 정치가 강력한 중앙정부에 의해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체제였다.

그러나 남부는 목화밭을 재배하는 등의 농업이 중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이 노예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보다도 훨씬 노예제도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그들은 각 주의 독립성이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강하기를 바랐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4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결국 북부가 승리하고 그 당시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 선언을 통해 미국의 노예제도를 법적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결국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100년이 지나고 나서도 미국의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그린북'이다.

법과 제도는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한참을 뒤쳐지고 있었다.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집에 일하러 온 흑인 두 명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상당히 애매하다. 완전히 흑인을 차별하며 살지는 않지만 그들이 사용한 컵을 자신의 가족이 사용하는 것은 허용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바로 그 당시 미국 백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셜리 박사와 트리오라며 같이 일하는 그들은(백인) 일 이외의 시간에 셜리와 함께하지 않는다. 즉, 셜리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사람으로서 '친구'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동료'와 '친구'로서의 개념은 영화 초반 관객들에게 보이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모자를 숨겨놓고 어렵게 찾은 듯 로스쿠도에게 갖다 주는 토니. 고맙다며 로스쿠도가 주는 돈을 거절하는 토니에게 '앞으로 로스쿠도라고 부르지 마라. 이젠 니 친구 지오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토니가 자신의 문제해결 능력을 어필하는 것을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면서 동시에 '친구'로서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 한다.

토니가 스스로 원할 경우 '친구'가 되기 위한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보이는 것이다.

 

밤의 술집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셜리
초청받은 곳에서 연주를 하는데 화장실은 밖에 있는 저것을 사용하라고 한다
수트를 판매하는 것은 괜찮지만 '입어보는 것'은 안된다
밤에 흑인이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검문 당하고 구속된다
오늘 밤의 메인 이벤트를 장식하는 연주자에게 창고를 대기실로 주며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한다
공연의 메인이벤트 연주자지만 공연전 그곳에서 식사는 할 수 없다

영화에서 나오는 백인들의 차별은 완전히 모순 덩어리다. 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공연을 하는 것은 초대했으니까 당연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 특히 '살아가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차별을 한다. 

하긴 이 영화의 제목이 그린북이니까... 미국의 남부에서 흑인이 갈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을 알려주는 안내책자가 따로 있는 정도니까.

흑인이 안전한 휴가를 보내기 위한 안내서

이렇게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셜리와 같이 일은 하지만 일상은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에 대해 '사람'으로서가 아닌 '기능'으로서 대한다는 인상이다. 그들의 기술과 능력은 인정하지만 사람으로서 사귀는 것은 백인들끼리 흑인은 흑인끼리라는 것이다.

근데 얼마 전 어스의 전작 겟 아웃이라는 영화를 보면 100년이 아니라 15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런 부분이 상당히 남아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그것이 '흑인'자체를 친구로 인정한 것일까 아니면 대통령이 될만한 오바마의 능력만을 인정한 것일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바로 그러한 점을 해결한다.

이 영화에서 토니는 유일하게 셜리와 함께 밥을 먹고 숙소도 함께 한다

토니는 다르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셜리와 함께 밥을 같이 먹고,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숙소도 함께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그를 들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순된 차별을 행했던 토니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던 자신의 아내 들로리스와 똑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토니와 셜리를 연결해주는 것중 하나인 KFC

여담이지만 둘의 연결고리를 위해 등장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켄터키 출신인 링컨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겟 아웃에서 주인공 크리스의 직업은 사진작가입니다.

그런게 영화 안에서 크리스의 직업이 반드시 사진작가여야 하나요? 만약 다른 직업이었다면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크리스의 직업은 영화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물론 눈이먼 사진작가가 크리스의 몸을 탐내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이유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왜 크리스에게 사진작가라를 직업을 세팅하고 그의 집이라는 공간을 세팅하고 그가 사진을 찍는 장면을 촬영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그가 사진작가인 이유는 사실 명확합니다. 

이 영화가 프레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프레임이란 우리말로 해석하면 틀이라고 할 수 있겠죠. 크리스는 <흑인>이라는 틀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했냐고 묻는 크리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흑인과 백인 사시에 벽이 있습니다.

그리고 파티에서 발견한 흑인에게 다가가 <형제, 브라더>라고 말을 겁니다. 즉, 그의 마음속에는 모든 흑인들은 형제이며 다른 인종은 형제가 아닌 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이것과 비슷한 프레임을 가지고 살아가죠. 남자, 여자, 연봉, 외모, 국가, 인종, 수많은 프레임으로 나누고 서로를 비교하고 구분합니다.

 

크리스가 프레임이라는 것으로 흑인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반대로 백인들은 <백인>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흑인을 차별합니다. 흑인은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노예로 부리던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할 때는 강인한 육체를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다면 크리스는 어떨까요?

그가 가진 흑인의 프레임은 백인을 차별하지 않나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크리스가 파티에서 흑인을 만나 반가워하고 자신을 죽이려던 백인들의 목숨은 모두 빼앗지만 우연하게도 흑인의 목숨은 죽이지 않죠. 그리고 결국 흑인에 의해 도움받고 탈출하며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의 젊음을 위해 흑인의 목숨을 빼앗은 백인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백인을 죽인 크리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워보면 그들은 서로 같지 않을까요?

 

 

 

영화가 시작되고 2분이 넘는 롱테이크 장면이 계속된다.

겟 아웃 영화에는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롱테이크로 찍힌 장면이 없는데 왜 굳이 맨 처음 장면만 이렇게 찍었을까?

항상 이야기하지만 최소 몇십억 몇백억의 돈을 들여야하는 영화에서 첫 장면을 아무 생각 없이 찍는 감독은 없다. 특히 이렇게 특이하게 촬영된 장면이라면 더더욱 그 의미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남자는 천천히 달리아웃하던 카메라 안으로 프레임 인 한다.

영상 속에서 내가 설명했지만 프레임인(frame in)이라는 행위는 상당히 주도적이며 때로는 공격적이다.

이 롱테이크 장면을 해석하자면 백인들의 구역에 한 명의 흑인이 들어온다. (프레임 인)

백인들의 감시망에 들어온 이 흑인을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켜보고 감시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기절할 때까지 카메라는 커팅되지도 그가 프레임 아웃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기절하고 나서야 영화속 두 번째 컷이 등장한다. 

이것이 조던필 감독이 영화의 첫 장면을 2분이 넘는 동안 철저히 계산된 동선으로 단 하나의 쇼트로 촬영한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촬영의 의미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백인들의 감시의 눈>이라는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끊임없이 관객들을 불안하게 한다.

 

크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앞에 앤드류가 첫 등장할 때 처럼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빠지고 인물이 오른쪽에서 등장하는 것까지 똑같지만 크리스는 앤드류와 달리 프레임에 스스로 들어오지 않고 카메라의 이동에 의해 포착된다.

이것은 우연히 백인들의 감시망에 들어와 잡힌 앤드류의 경우와 로즈라는 사냥꾼을 밖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덫으로 끌어들인 백인들의 사냥 방식과 철저하게 맞아떨어진다. 

좋은 영화란 이렇게 내용에 맞는 영화의 형식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로즈의 집에 도착한 크리스를 멀리서 지켜보는 쇼트가 있다.

카메라가 다시한번 천천히 뒤로 빠지면 그들을 지켜보는 정원사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로써 관객들은 명확하게 카메라가 크리스를 감시하는 시선으로써의 역할을 한다고 느끼게 된다.

 

로즈의 집에 들어선 크리스의 모습을 아직도 이렇게 멀리서 따라갈 필요가 있었을까?

표정도 잘 안 보이는 사이즈로 굳이 그의 모습을 천천히 벽 뒤에서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은 다시 한번 집에 들어온 사냥감을 천천히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크리스가 2층으로 올라가자 저마다 대화를 나누던 백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조던 필 감독은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단서를 던진다. 

백인들은 끊임없이 크리스를 감시하고 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크리스의 강인한 육체를 살펴보고 그가 도망치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죽어가는 로즈의 시선 너머로 크리스가 멀리 사라져 가다가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백인들의 감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영화의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크리스.

 

그리고 이것은 영화 겟 아웃의 디렉터스 컷의 마지막 장면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백인들의 마을로부터 탈출하는 장면과는 다르게 원래 촬영된 장면에서는 그가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철창 너머의 철창과 복도 수많은 프레임 안에 갇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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