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점은 시시각각 변한다
하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수한다
그누구의 입장도 되지 않고 보여지는 슬픈 사랑이야기에 우리는 손댈수 없는 3인칭으로서 가슴아파한다

이장면은 츠네오와 조제가 동거하고 1년뒤 그리고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동네 꼬마들이 휠체어를 버릴거냐고 묻자 조제는 담담하게 '응'이라고 대답한다>

츠네오의 이사를 돕고 츠네오가 없을때는 조제를 돕고 놀아주던 동네 꼬마들이 와서 묻는다
가만히 놓여져있는 휠체어를 버릴거냐고
조제는 아이들 쪽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응이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에서 미묘한 조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의 물음에 그쪽을 잠시 쳐다보고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조제가 아이들이 버릴거냐고 묻는 개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휠체어를 더이상 고쳐주지 않는 츠네오에 대한 심리의 흔들림으로 보여진다

<더이상 고칠수 없다는 말을 들은 소녀의 표정이 이상하다>

오빠에게 고쳐달라고 말하지만 조제는 '더이상 고칠 수 없데'라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들은 소녀의 휠체어를 쳐다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더구나 갑자기 이 장면만이 클로즈업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클로즈업된 이 장면은 감독이 큰 의미를 둔 샷이라고 해석된다
왜냐하면 이 씬의 다른 모든 장면은 단독 클로즈업이 없으니까
오직 이 소녀의 표정만이 감독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

소녀의 표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제는 더이상 고칠수 없데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말을 들은 소녀의 표정은  '아 고칠 수 없구나'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굉장히 어린나이에도 느낄수 있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이 소녀가 느낀것은, 감독이 지시한 것은, 관객이 느껴야하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이걸 왜 못고쳐?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니까
또는 이걸 왜못고쳐 못고치면 새로 사면되자나 라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소녀의 감정을 뭐라고 말로 표현하듯 그녀가 이순간에 느낀 감정은 아마 조제에게 소홀해진 츠네오였을 것이다
그것을 츠네오도 조제도 아닌 이 소녀가 알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이 소녀의 표정을 보고 관객이 눈치채주길 바랬다

어째서 감독은 츠네오도 조제도 아닌 소녀에게 제일먼저 이사실을 알려주는가?
조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어느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츠네오는 마지막까지 몰랐다
그 사이에서 남들이 알아챌 만큼의 빈틈이 벌어졌을 찰나를 감독은 잡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조제와 소녀들의 대화로 표현했다

세익스피어는 '바보들의 입을 통해 진실을 말해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야기의 주제라던지 꼭 알려야하는 사실을 바보들의 입을 통해서 말하라는 것이다
어째서 바보인가? 바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보의 말은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래서 바보가 말해야 하는것이다
영화 '노팅힐'의 스파이크(이 이름이 맞나?)를 생각해보자
휴그랜트가 마지막에 그녀를 포기하자 친구들은 다들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누구도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논리적이고 어른스러운 선택을 한것이다
하지만 바보 스파이크는 달랐다
개소리하지말고 빨리가서 그녀를 잡으라고 휴그랜트에게 말한다
그말을 듣고 그는 줄리아로버츠를 찾아가 그녀를 얻는다
그녀를 잡으라는 말은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거짓말보다 두려운 법이다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이용한다
많은 현대영화에서는 바보보다는 이렇게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이용한다
어린아이는 바보와 같이 순수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물론 영화속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츠네오가 소홀해졌다는 것을 어른이 이야기한다면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거짓말일수도 있고 착각일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느낀 소녀의 표정으로 관객들은 츠네오가 변했다는 것을 느낄수 밖에 없다 소녀는 거짓말 하지 않으니까 더구나 말로 한것이 아니라 표정으로만 보여준 것이니까 이것은 거짓일 수 없다

이 영화에는 화려한 연출과 편집은 없지만 이렇게 한순간의 표정과 대사의 공백만으로 표현되는 디테일한 감정선이 존재한다
츠네오가 떠날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조제의 감정이 주로 그렇다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결코 입밖으로 한번도 꺼내지 못하는 조제는 여기에서도 그저 '응, 더이상 고칠수 없데'라고만 대답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제는 알고 있었다
츠네오는 어차피 떠날것을... 그래서 휠체어는 어차피 필요 없어질 것을... 그래서 고쳐달라고  떼쓰지 않았고 새로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츠네오가 떠나고 나면 혼자서 살아갈 힘을 조제는 1년사이에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
내가 엄청나게 성공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을..
또, 내가 굉장히 불쌍하게 죽은 이후에 날 위해 울어주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린적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브레또도를 돕고 집에 오는길에 장님 할아버지를 돕고 저녁을 해먹다가 옆집의 외로운 아저씨를보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외롭다는 것을 알게된 아멜리에의 모습이다
그녀는 티비를 보다가 평생을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상상 장면을 어떠한 편집도 없이 실제로 아멜리에가 보고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어떠한 상상이라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일반적인 장면이 나오고 있던 뉴스는 자연스레 아멜리에의 이야기로 바뀐다>

영화에서의 감정 표현 방식은 대부분 간접적이다
소설에서는 빈번히 등장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영화에서는 흔치 않고 영화에서의 감정 표현은 대사나 행동으로 간접적으로 전달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아멜리에'에서는 등장인물 이외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전지적작가 시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는 아멜리에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직접적으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전지적화자는 아멜리에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느끼고 있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훨씬 영화적인 표현 방식을 택한다

마치 그녀가 실제로 티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듯이 그것이 그녀의 상상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채 전지적 작가는 그녀의 상상을 그대로 관객에게 읽어준다
전지적 작가로서 그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때는 그저 그녀의 대변자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시점의 변화가 많지 않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 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변환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 작품에서 한두번 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시점이 계속 변화한다 대부분은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경우에 따라서 영화는 너무나 쉽게 시점을 변화 시킬수 있다
여기에서도 간단하고 미묘하게 시점을 바꿔준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의 시점으로 영화는 이동한다

<그리고 이 상상장면은 아멜리에의 감정을 너무나 쉽게 알게 해준다>

계속되는 이 상상장면은 그녀의 내면을 아낌없이 설명해준다
그녀가 어릴적부터 친구가 없었던것과 그래서 다른사람을 사귀는것이 서투르다는것 그래서 남을 돕기 위해 혼자서 외롭게 살았던것 그렇지만 그녀의 아버지 만큼은 돕기가 쉽지 않다는 그녀의 감정을 말해준다
그녀가 그렇게 느낀다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벗어나서 이 때 만큼은 3인칭 관찰자 시점마냥 그녀의 상상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관객은 그 상상을 통해서 그녀가 지금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직후에 아버지가 걱정된 아멜리에는 한밤중에 그의 집에 찾아가 어머니를 위해 장식해둔 인형을 뽑아서 훔쳐나온다
그리고 그의 여행을 위해 사진을 찍어서 모스크바로 부터 아버지에게 보낸다
이것은 이 포스트에 설명하기 뭐하지만 굉장히 유기적인 스토리라인임을 알수 있다
사실 아멜리에의 많은 씬들이 유기적으로 짜임새 있게 이루어지지만 자신을 불쌍히 여기다가 아버지가 생각나서 아버지를 급히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찢어진 증명사진을 이어붙인 앨범을 줍게 된다는 설정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준다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도 히치콕 형님은 영화의 카메라는 누군가를 훔쳐보는 창(windows)이라고 말씀하셨지
솔직히 정확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잘 기억 안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
히치콕 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데에는 역시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지
스릴러라는 장르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영화의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무서운 장면을 훔쳐보게 했다고 생각하셨으니까

하지만 난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의 촬영은 모두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공부하다보면 '시점샷'이 분명히 따로 있고 그에 따른 반응샷도 분명히 있지만 사실상 난 모든 샷이 시점샷이라고 본다
다만 구분을 하자면 영화에서 부르는 '시점샷'은 등장인물의 시점이고 내가 말하는 의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아도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예를들어 본다면 로우앵글은 어째서 사람을 위대하고 무섭게 만들며 하이앵글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걸까
정말로 단순하게 말해서 키가 작은 사람이 올려다 보는것과 키가 큰사람이 내려다 보는것의 차이가 아닐까
그리고 흔히 bird's eye view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이렇게 부르고 싶다
'신의 시점' 이라고..
다들 알겠지만 살인의 추억에서도 반복해서 나오듯이 사람이 죽은 장면을 머리 꼭대기에서 찍는 것은 흔한일이다
나는 이것이 주는 느낌이 바로 신의 시점에서 인간의 무력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자살한 아오이 유우>

이 사진을 보면 물론 아오이 유우가 높은곳에 떨어져서 위에있는 철선에 피를 묻히고 떨어졌다라는 상황 설명도 되지만 느낌상 그녀의 죽음은 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와줄수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여하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첨부한 동영상은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씬이다
둘의 키스가 이루어지고 카메라는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위로 올라가며 그둘을 비춰준다

<하늘위로 날아가면 둘을 비추는 카메라>

이런식의 촬영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흔히들 이렇게 표현한다
하지만 이 컷이 넘어가면서 여주인공은 마치 자기가 이 카메라의 시점으로 자신과 남자의 키스를 보면서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놀랍지 않은가?
사실 이러한 촬영 자체는 여주인공의 행복한 심리를 나타내기 위한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제3자에게 이야기 한다
이것은 고전적 헐리우드 스타일의 현대 영화에서는 아직은 문법화 되지 않은 표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카메라는 선택적으로 순간순간 시점을 바꿔서 촬영할뿐 그 컷이 누구의 시점이었는지 말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사실상 이러한 3인칭의 시점은 설명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시점을 카메라 안에 있는 여주인공의 시점이라 설정하고 그것을 또 다시 관객들에게 이야기 해줌으로써 여주인공의 행복한 심리를 더욱더 극대화 한다고 할수있다

이러한 표현은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느낀 행복을 남들이 보고는 잘 모른다 그것을 내가 남에게 이야기 해주는 장면을 또 봤을때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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