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젠슈타인이 주장했던 몽타주는 컷과 컷의 충돌로 인한 새로운 뜻이었지만 사실 내 생각에 현대에서는 씬과 씬을 넘기는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이런 몽타주 기법이 자주 사용된다.

<카메라가 틸트다운되어 끔찍한 사체가 보여지고 곧 생고기의 컷으로 편집된다>

위의 두컷을 보자. 연속된 이 두컷의 경우 전혀 상관 없는 서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의 컷이 연쇄 살인범에 의하여 살해당한 피해자 여성의 사체이며 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살인의 잔혹함과 피해여성에게의 동정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밑의 컷은 그저 그들이 백광호에게 미안해서 그의 집에 찾아가 고기를 좀 팔아주는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굳이 고기집에서의 첫 장면이 고기집 간판인 설정샷이 아니며 백광호를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고기가 얹어지는 모습이 먼저 등장한다. 사실 영화의 극적 맥락을 생각하면 고기를 먼저 보여주는 것보다 설정샷이나 백광호의 모습부터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봉준호는 시체와 생고기를 연속으로 보여줌으로써 연관지어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것이 바로 몽타주 기법이 아니겠는가..

끔찍한 사체를 본 직후에도 고기를 구워먹는 형사들의 무신경함을 비꼬는 장면일수도 있고 우리가 먹는 생고기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의 목숨도 너무나 쉽게 사라진 다는 상징일수도 있다. 또는 단순하게 그저 사체와 생고기의 이미지의 유사성으로 인한 편집일 수도 있다. 2009/09/13 - [영상문법] - 장면 유사의 몽타주 -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에서 처럼 말이다.

아무튼 오직 이 몽타주를 위해서 백광호의 아버지가 고기집을 운영하고 있는 설정으로 잡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에서 이 장면 이외에는 백광호의 집이 고기집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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