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내용은 하나와 앨리스의 한장면에서 계속해서 사용되는 셔레이드 기법이다
사실 이 셔레이드란 것은 전에 소개한 '영화적 문체 - 은유법'과 비슷한 맥락이다 내 생각에 이 둘은 서로 겹칠때도 있으며 사실상 거의 같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은유를 언어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방식이라면 셔레이드는 비언어적으로 대치시켜야 하는 영상 문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셔레이드라는 말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비언어적 감정표현이다
대사로 전달되지 않는 일련의 행동이나 또는 화면구성으로 되어있는 것들이다
나는 굳이 영화에서의 은유적 표현과 셔레이드를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영상에서 소개할 3가지 셔레이드중에서 나는 한가지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나로서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나만의 구분방식이다

우선 이 장면을 설명하려면 스토리를 설명해야한다 (이 장면에는 대사 자막도 없으니..)
이 영상에서 나오는 여자 -하나- 는 남자에게 거짓말을 한다 
바로 하나와 그는 얼마전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며 남자가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상실에 걸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물론 이것은 그를 일방적으로 좋아한 하나의 거짓말이다
어쨌든 둘은 사귀게 되지만 그는 하나의 집에 놀러가서 컴퓨터를 고쳐주다가 하나가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로 입학하기전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하나가 거짓말을 했음을 깨닫고 절간에 있을때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추궁한다
바로 이 영상이 추궁장면이다

먼저 첫번째 셔레이드 장면을 소개하겠다
영상의 13초부근데 나오는 바로 이장면이다

<소년이 스님에게 채로 맞는 장면>

미리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절간에서 이렇게 채로 얻어 맞는 것은 머릿속에 잡념이 가득하다는 꾸짖음이다
이 장면은 사건 직전에 설정샷 같은 곳에 짧게 나오는 것이므로 단순히 생각하면 그가 지금 절에 와 있다라는 정도의 정보밖에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뒤의 사건을 보고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컴퓨터에는 왜 그녀가 입학하기전의 내사진이 있었을까 이것은 그녀가 그전부터 날 좋아한다는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녀에게 끌리지 않는데 혹시 그녀가 거짓말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설정인 것이다
때문에 이 장면 직후 소년은 하나에게 전화를 건다
굳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잡은 사각 로우앵글로 이 맞는 장면을 클로즈업 한 이유는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이 그러한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장면은 복잡한 소년의 심정을 나타내는 셔레이드인 동시에 이 직후에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컴퓨터에서 사진을 찾아낸 사실을 추궁하는 사건에 대한 복선인 것이다 

두번째 셔레이드는 바로 내가 이 부분을 집중있게 본 많은 관객들이 느꼈을 그런 노골적이고 아주 익살스러운 부분이다
소년은 전화를 걸어 하나와의 통화가 시작된다
25초부분 부터 시작된 통화는 계속되다 1분 23초 쯤이 되어서 한 내재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절에서 다른이들이 경을 읽는 소리이고 이것은 1분 29초에 남자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잡혔을 때에 하나가 느꼈을 당황스러움에 대한 사운드 셔레이드이다

<소년의 지시대로 하다가 튀어나온 사진을 본 하나는 눈이 똥그래지게 놀란다>

1분 29초부터 당분간 계속되는 남자의 추궁과 함께 절의 경 읽는 소리는 더욱더 크게 들리고 그것은 마치 '딱걸렸네~ 딱걸렸어~' 하는 느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틀림없는 이와이 슌지의 의도이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것을 진지하고 나쁜것으로 이야기 하는것이 아닌 익살스럽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보여진다 
1분 40초경부터 그녀의 감정을 보조하는 bgm이 시작되고 -이것은 '어떡하지?' 정도의 느낌이다- 2분 26초경이 되어서 bgm과 경읽는 소리가 사라진다
이것은 당황하던 하나의 감정이 끝난것과 어떻게 하지하고 고민하던 하나의 생각도 정리가 됐다는 연출적 사운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은유적 표현'이라고 부르고 싶은 3번째 셔레이드가 나온다
 
<2분 35초경에 자리를 고쳐 앉는 하나의 뒷모습>

그녀는 그가 모든것을 알아챈것에 당황을 느끼고 어떡하지 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것은 관객들도 당시에 그녀와 동일시 되어 느끼는 감정이고 그직후에 나올 하나의 반응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그러한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하나는 꽤나 재미있는 대답을 내놓는다
바로 거짓말을 자백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거짓말로 이 사실을 무마하려 한다
이 위의 사진은 2분 35초경에 하나가 앉은 자세를 고쳐 앉는 장면이다
그녀는 여기서 왜 굳이 옆으로 돌려 앉았을까?
자세가 불편해서? 그런 이유로 감독과의 상의도 없이 이루어진 행동은 아닐것이다
이와이 슌지는 그녀에게 새로운 거짓말을 하기전에 그녀의 결심을 나타내는 셔레이드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의 뒷모습은 바로 여기서 굽히고 자백해서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하나의 굳은 의지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추가로 이 부분에서 느낀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통화의 장소로 이와이 슌지가 '절'을 택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보면 소년이 절에 찾아가야 하는 논리적인 사건은 없다
그렇다면 감독은 무엇을 위해 굳이 절에까지 가서 촬영을 해야했을까
우리나라의 단편영화라면 그냥 자기 자취방에서 전화했을텐데
그것은 초반에 나온 잡념으로 가득차 스님에게 얻어 맞는 장면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소년이 잡념으로 가득차 있는것은 얼마든지 표현할수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넋을 놓고 있을수도 있고 자취방에서 끓이던 라면이 물에 넘치고 있을수도 있다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을 선사한 경읽는 소리를 그녀의 당황하는 감정에 매치시키고 싶어서였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많은 소리가 있지만 여기에 나온 경릭는 소리만큼 그녀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소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매치를 이와이 슌지는 찾은 것이다

두번째로 재밌는 것은 절에 있는 사람들은 왜 외국인인가 하는것이다
<대체 왜 일본의 절에서 외국인들이 경을 읽고 있는가?>

설마 일본에 있는 외국인들이 인건비가 싸서? 굳이 일본의 절에는 다소 어울리지도 않는 외국인을 엑스트라로 고용한 것일까?
이것은 약간은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이와이 슌지가 그녀의 당황스러움은 전세계급이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상 이것은 내 추측이고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이와이 슌지가 이 영화를 귀여운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디테일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씨네마틱에 게재된 글입니다>


몽타주 하면 아는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이론화한 영상 문법입니다
간단하게 뜻을 설명하자면 컷A와 컷B가 충돌해서 새로운 뜻을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려운 분들을 위해 가장 유명한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텐킨의 몽타주 장면을 설명하면 앉아있는 사자 동상 컷 뒤에 바로 일어서있는 사자동상 컷을 붙입니다
이것들은 독립된 개체로 서로 같은 동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에이젠슈타인은 이것은 결코 일어설수 없는 사자동상(군중)이 일어섰다(봉기했다)라는 의미로 충돌시킵니다

어쨌든 현대 영화에서 대부분의 컷이 충돌이 아닌 화합으로 이루어져있지만 가끔 몇몇 감독들에 의해 몽타주가 - 주로 씬과 씬의 연결에서- 보여지기도 합니다

위의 동영상에 보면 발레연습을 하다가 발목을 삔 앨리스가 아파하자 주변의 동료가 봐주러 옵니다. 그리고 앨리스의 발에 얼굴을 맞아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다음씬에서 병원의 두개골 사진이 나옵니다
영화를 보는이들은 이것을 당연스럽게도 앨리스의 발에 얼굴을 맞은 그녀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의외로 남자주인공이 기억상실을 진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장면이라는걸 곧 알게 됩니다.

<사진A - 얼굴을 감싸고 드러누워있는 발레녀>

<사진B - 병원의 두개골 X - RAY 장면>

영화의 스토리상 발레녀가 얼굴을 맞는 장면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후에 얼굴을 맞은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 나오지도 않고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사건이 야기되지도 않습니다
익살스럽게도 이어지는 병원씬은 영화의 큰 스토리상 남자 주인공이 내가 정말 기억상실증이 맞는지 의심하는 장면입니다
이 두 장면을 이어붙여서 전혀 새로운 사실을 만들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조크같은 훼이크이며 영화에서 크게 작용하는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의도한 몽타주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발레를 하다가 아무런일이 일어나지 않은채 병원씬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편집보다 지루합니다
결국 이러한 두 쇼트의 충돌로써 얻어낸 효과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스토리 외적인 재미를 줍니다
이것은 스토리 외적인 CG나 액션 장면 같은 효과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몽타주 기법은 한국영화의 장면전환에도 많이 쓰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시체 부검장면 직후 나오는 생고기를 굽는 장면이나 김상경이 박해일의 자취방에 쳐들어가 발로 찬직후 박해일이 동굴앞에서 넘어지는 시공간 압축 몽타주 또, 올드보에서 이발소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의 종소리와 여성이 무릎이 바로 이어지는 회상장면의 자전거의 종소리와 윤진서의 무릎으로 이어지는 몽타주등 으로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씨네마틱에 기사화된 글입니다>

하나와 앨리스 시간의 압축 확장때 확장때 주로 이야기 했던 평행 편집부분이다
이 영상에 나와있는 것처럼 다른장소의 이야기들을 교차로 보여준다고 해서 교차편집이라고 편하게 부르기도 한다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은 사실 한장면이 쭉 보여지고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것은 주로 영화의 주인공을 따라서 사건이 흘러가기 때문에 카메라는 주인공을 계속 비춰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매우 많으며 사실상 주인공이 여러명인 영화도 많다
그러므로 감독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교차로 보여준다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택으로 많은 영화적 메시지와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첨부한 동영상 부분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비극과 희극을 교차한다는데 있다.
이것은 R.ef의 이별공식의 가사에서 처럼 햇빛 눈이 부신날의 이별은 비오는날 보다 심하고 작은 표정과 눈물을 감출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노래한 것과 비슷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부분에서 만담을 하러 올라가기 전에 그리고 이미 무대에서는 만담이 펼쳐지고 있는데 무대 뒷편에서는 너무나 슬프게 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던져준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무대위의 희극과 대비되어 더 가슴아프게 느껴진다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관객들의 감정이 슬퍼하는 하나에게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데 중간중간에 희극장면을 넣는다는 것은 감히 편집하기 두려운 일일 것이다.
아무튼 이와이 슌지는 그렇게 편집을 했고 나는 꽤 성공적이게 장면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뒤와 무대위의 만담이 교차편집 된다>


그리고 이부분에서 조금더 디테일한 사운드 편집 장면이 들어가있다
이 교차편집은 다른장소지만 사실은 무대위의 소리가 들릴만큼의 가까운 거리이므로 무대위의 소리가 뒷쪽까지도 완전히 전달된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는 이 무대위의 사운드를 선택적으로 무대뒤쪽에 들려준다
처음에는 만담이 없어서 전혀 들리지 않던 무대위의 소리가 1분 55초경을 보면 분명히 하나의 울음위로 들려온다.
하지만 하나의 울음이 극에 달하는 1분 59초의 순간에는 음악만을 들려주고 순간적으로 무대위의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하나의 울음이 폭발하는 순간 음악이외의 사운드는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던 대부분의 관객은 그 짧은 순간에 밖의 소리를 인위적으로 차단하여 하나의 슬픔을 극대화 시킨것을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의 슬픔이 극에 달하고 울음을 꿀꺽 삼키는 듯한 느낌만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교차편집이 되며 다시 무대뒤의 하나의 샷에서는 무대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단 한컷만이 무대위의 사운드를 차단시켜준다
이것은 역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지만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감독은 2분 11초경에 나오는 하나의 단독 클로즈업 샷까지는 무대위의 소리를 들려주지만 2분 16초경부터는 하나의 대사가 시작되고 다시금 무대위의 소리를 차단시켜 준다

이 사운드 편집을 종합해서 설명하면
사실 처음부터 무대위의 사운드를 차단하고 시작했다. 무대위의 소리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하나에게의 관객몰입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들려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가 말을하다가 울기 시작하고 이제서야 무대위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한순간 울음이 극에 달하는 순간 무대위의 소리를 차단하지만 다시 들려주고 결국 하나가 다시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는 다시 무대위의 소리를 차단해 준다.

이 하나가 우는순간 무대뒤로 전달해준 만담의 사운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끊기고 우는 순간 그녀의 귀로 들려오는 만담소리가 하나에게 더 큰 슬픔과 창피함을 전달해준다는 감정적인 편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슬픔이 극에 달하는 순간에는 만담소리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다시 시 작하는 시점에는 만담의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감정에 치우친 편집이라고 생각하지만 관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무대위의 만담이 들려오고 이것은 위에서 말한대로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하나의 슬픔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씨네마틱에 기사화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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