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재밌게 보고 싶은 사람은 글을 읽기전에 꼭 영화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의 첫장면은 평범하다 그래서 상당히 인상깊다. 하지만 그러려면 관객들이 몰라야 하는 사실이 있다.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조쉬 하트넷 : 도날드를 말그대로 처음인 것처럼 만나야 한다.

나는 운좋게도 어떤 정보나 친구의 추천 없이 이 영화를 접하게 됐다. 그래서 첫장면에 감독이 의도했을지 모를 영화의 주제를 느꼈다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을수 없다.

위의 포스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색다르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라도 자기네 이야기가 색다르다고 하지 포스터에서부터 누구나 생각해볼법한 평범하고 알기 쉬운 이야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평범하게 시작한다. 주인공 도널드가 택시기사라는 것을 알려주며>

 
영화의 시작 주인공 도널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햄버거를 먹으며 택시를 몰고 있다. 뒷자석에는 나이가 지긋한 동양인 두명이 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장면에서 도널드가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말 자체를 몰랐지만)
주인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택시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운전중에 햄버거를 먹는건 좀 이상했지만 미국에 가본적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감독은 관객에게 도널드를 '정상인'처럼(이말이 기분 나쁠수도 있겠으나) 보여주고 싶어했다.

<갑자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더니 사고를 내고 그자리에서 도망쳐버린다>


도널드는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한다. 지금의 직장이 좋다는것. 여러개의 택시회사에서 짤렸다는 것.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하지 못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심지어 사람들은 필자에게 맨날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뒷자석에 손님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자 갑자기 불안해 보이던 도널드는 결국 차사고를 낸다.
그리고 그는 어쩔줄 모르며 트렁크에 있던 음식을 들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것이 이 영화의 첫 씬이다.

2009/09/09 - [영상문법] -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에서 처럼 영화의 첫 시작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강력하게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이후에 씬에서 바로 도널드가 자폐증이라는것이 밝혀지지만 감독은 그것을 최대한 늦게 알려주려고 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일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를들어 우리가 길에서 어떤사람을 봤는데 그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해보자(조금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가 자폐증이나 어떠한 정신적 질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바로 추측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네 또는 완전 또라이 아냐?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폐증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상한 사람' 또는 '완전 또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정상과 비정상의 애매한 경계속에서 그것을 특정지어 구분할 수 있게 의학용어로 만들어진 자폐증이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 쉽게 말하자면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을 우리가 길에서 봤을 때 우리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폐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알게 되면 우리는 마음을 좀 누그러 뜨리고 그 사람을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자폐를 앓고 있는 남녀의 사랑이다. 자폐란 한국에선 공공연한 '장애'다. (외국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므로 이렇게 쓴다) 장애우들의 사랑 영화라면 어떨까? 먼저 미리 짐작해 보라. 나의 경우엔 내 생각과 이 영화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은 마치 얼마전의 내 이별 이야기처럼 비슷했다. 장애우들의 사랑이라고 뭔가 특별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미안하다고 전화로 사과했다. 물론 조금더 히스테릭한 면이 있었지만. 똑같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랑이야기였다.

결국 이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에 대한 시선에 대한 직설적인 이야기를 던지고 있다. 당신은 장애우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물론 다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다르다. 여자친구가 클럽에 춤추러 가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견딜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폐는 차별을 받는다.

자폐라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것이다. 그들에게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남들과 차이가 있다. 때로는 나도 왜그럴지 모르게 나약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자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쉬하트넷의 자폐연기 만으로도 평점 9점을 주고 싶은 영화


역사물 특히 특정 인물에 관해 다룬 영화라면 기대만큼 스펙타클하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옛날 김득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챔피언이 그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픽션보다 극적 요소를 과하게 집어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만들려면 굳이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할 필요가 없다. 현대 영화에서 이런 역사적 인물을 다룬 영화들은 다소 비주류의 느낌을 풍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카핑 베토벤이 다룬 시점은 바로 베토벤의 인생중 마지막이다. 영화를 시작하면 이미 귀가 멀어있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손가락질 해댄다. 영화에서 이 시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이영화의 내용과 주제가 그려질 것이다.

이 영화는 귀가 멀었음에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함에도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괴물같은 열정을 다루고 있다. 때문에 영화에서 실제로 베토벤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어쩌면 노린걸까)
그리고 그것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베토벤을 카피하는 여성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전에 이야기 했듯이 (너무 오랜만에 포스팅이라 언제 어디서 이야기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서 링크를 걸지 못하는점은 정말 미안 죄송 쏘리) 영화의 시점은 문학보다 훨씬 가변적이다. 이 영화에서 딱한번 확실하게 베토벤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장면을 다룰 것이다.

<무려 10분이 넘게 보여지는 오케스트라 장면>


베토벤을 다룬영화라면 음악이 상당히 많이 나올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이 장면에서 단 한번 뿐이라고 할수 있다.(사실 조금더 있긴 하지롱) 하지만 그 단 한번에 이영화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무려 10분을 넘는 연주 장면. 이봐 너 상상이나 할수 있겠는가? 100분 정도의 현대 영화에서 한씬이 10분이래도 미칠 지경인데 (보통 한씬은 1분 중요한 씬은 3~5분?) 오케스트라 한 장면이 10분이 넘는다. 과연 관객이 이 장면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영화에서의 이 10분은 다른 90분보다 가슴을 꽉꽉 조여온다.

뭐 아무튼 위 장면을 조금 설명하자면 베토벤이 귀가 안들림에도 지휘를 맡겠다고 고집을 부린다.(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이때의 음악이란 작곡한다고 자기가 연주하는게 아니라 지휘를 맡아야만 자기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작업실에서 만들어서 녹음해서 다른사람에게 들려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귀 때문에 음악을 들으며 박자가 정확한지 음의 세기와 크기는 적당한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베토벤을 여주인공이 돕는다. 오케스트라 사이에 앉아서 베토벤과 함께 지휘를 한다.

이 장면이 10분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쫄깃쫄깃한 이유는 바로 이 베토벤과 여성의 음악적 교감이라는 감정적 흐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래 영화에서 공연 장면은 보여주기 위주여야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 장면은 둘 사이의 교감에 최대한 많은 할애를 하는 듯 보여진다.

어쨌거나 이렇게 베토벤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지휘는 어마어마어마한 감동을 주며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지휘를 마친 베토벤>


앞에 잔소리(아이유가 부른걸 듣고 싶네)가 길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여기부터다.
오케스트라가 끝나고 영화의 사운드는 흔히 하는 것처럼 잠시의 적막을 들려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잠시의 적막 후에 퐉~! 하고 터져나오는 함성을 단번에 관객에게 들려줘서 감동을 전하기 위함인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한다.

위의 스샷의 첫번째를 보면 오케스트라 중에도 잘 잡아주지 않던 베토벤의 정면 클로즈업이 보일 것이다. 연주가 끝난 직후의 베토벤의 표정인데 영화의 사운드는 이 장면에서 순간 사운드를 사라지게 한다. 아니 베토벤의 시점으로 돌아가 웅~ 하는 공간음 같은 것만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무음이나 다름 없게 베토벤의 뒤로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해서 박수를 치는 화면만을 보여준다. 그들의 함성과 박수는 모두 몇십초 뒤로 양보한다.

베토벤이 아직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자신이 힘들게 개쌍욕먹어가며 준비한 공연의 성공여부를. 관객에게도 망할놈들아 니들이 베토벤보다 먼저 느끼면 안되자나. 1인칭 시점을 준비해줄테니 동시에 느껴줘 라고 감독은 말한다. 아니 생각한다. 아니 연출한다.
그리고 멍때리고 있는 베토벤에게 다가온 여주인공이 손을 잡아 뒤로 돌려주는 순간 즉, 베토벤이 관객들을 보는 순간 그가 상상으로만 들을수 있는  함성과 박수소리를 우리는 실제로 듣게 된다.

베토벤 시점이란 우리가 이 박수와 함성을 듣게 되기 전가지의 짧은 순간일 것이다.

영화의 시점을 의도적으로 여주인공을 통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한것은 바로 이 장면의 임팩트를 위해서였나? 그건 아닐테지만.

연출 의도는 매우 바람직하며 성공적이라고 보여진다. 영화의 감정적 클라이 맥스인 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극명한 사운드 대비를 이용하며 그것을 마침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의 시점과 동일시 시킨것이다. 아마 꽤나 오랜동안 고민한 연출이라 생각된다.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아마 실제 인물을 다룬 영화에서 어느정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스펙터클을 이 10분이 남는 오케스트라 장면이 (특히 마지막 연출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내 개인적으로)

영화내내 고집스럽고 병신같은 모습만 보여주던 베토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실제로 베토벤이라는 인물이 아직까지도 그렇게 여겨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씬의 연출이야 말로 카핑 베토벤 영화 자체이며 영화의 주제를 보여준다. 

막상 포스터에서는 여주인공이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그렇긴 한데...) 그냥 3인칭 관찰자 정도로 생각하고 영화를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영화의 중심은 베토벤이다.
언어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의 대조는 사실 굉장히 촌스럽기 마련이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상황과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촌스러움을 장점으로 활용하는 장르가 바로 코메디다. 물론 이 영화는 코메디는 아니다. 하지만 로멘틱 코메디라는 장르로 생각하면 꽤나 감안해줄만 하다.

더구나 이 영화에서 나오는 대조는 급조한 것이 아니라 영화이 형식상 당연히 사용될 기법이라 세련된 느낌을 준다.

<282일 톰은 가전마트에서 싱크대가 고장났다고 투덜거린다>

만난지 282일 톰은 가전제품 마트에서 싱크대란 싱크대는 전부 고장났다며 섬머에게 장난을 친다. 하지만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장면 직후에 34일째로 점프한다.

똑같은 마트에서 톰과 섬머는 아주 지랄이 풍년이다
쇼파에 앉아서 티비를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고 (하지만 티비는 나오지 않는다) 싱크대에서 요리를 해먹는 시늉을 한다. 이때 섬머가 싱크대가 고장났다고 투덜대자 톰은 그래서 부엌이 2개인 집을 샀다며 다른 주방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눈꼴 시려운 연애를 하는 34일의 그들의 모습을 282일에 다시 보여준다. 섬머의 감정이 확실히 식었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줘서 관객에게 서글픔을 전달한다.

오히려 이런 방식의 편집으로 영화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하지 않고 슬프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조금은 쿨하게 진행된다.

<섬머는 도발적으로 톰을 유혹한다>

그리고 톰의 집. 화장실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톰은 나체의 그녀를 발견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지진 않지만 둘은 아마도 격렬한(?) 섹스를 한다.

다음날 톰은 너무나 행복하다.

싱글벙글 웃으며 나오는 톰에게 경쾌한 bgm이 흘러나오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멜깁슨처럼 잘생겼다.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기쁨을 함께 나눠주며 반갑게 인사를 하고 길에서 다같이 뮤지컬이라도 하는듯 춤을 춘다.

이부분이 표현 방식은 상당히 직유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톰의 행복한 감정이 이런 뮤지컬 같다라는 방식으로.. 아무튼 이렇게 2분 정도 미친듯이 그의 행복을 보여준다.

그리고 출근을 위해 엘레베이터를 탄 순간 영화는 다시 303일의 톰을 보여준다.
303일의 톰은 엘레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그가 얼마나 만신창이로 힘든지 보여준다. 머리는 헝크러져 있고 얼굴은 헬쓱하며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힌후의 대조를 보여주는 방식은 꽤나 있었지만 이 장면은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의 훌륭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으로 하여금 톰의 슬픔에 같이 빠져서 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유치한 대조라는 방식으로 이야기 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편안하게 볼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이별에도 관객은 미친듯이 아파하지 않고 톰의 새로운 사랑에도 힘껏 응원해줄 마음이 들게 한다.

만약 관객들을 깊은 몰입과 슬픔으로 몰아넣었다면 이런 쿨한 결말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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