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쉬백은 시간을 멈추는 남자의 이야기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영화가 시간을 멈추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별할 때 나를 향해 욕하는 여자의 얼굴표정을 고속촬영하는 느낌, 이 세상이 다 정지하고 사랑하는 우리 둘만이 움직이는 느낌을 영화로 표현해 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스토리를 위해 장면을 구상하는 영화가 아닌... 장면을 위해 스토리가 생겨난 그야말로 이것은 연극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영화에서 파생된 영화다.

고속촬영은 2009/02/22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정보전달의 통제를 통한 시점화 <포 미니츠,Vier Minuten>를 참고하도록 하자.


<젠장 캡쳐된 사진은 여전히 찌그러져있군>

이영화는 곰플레이어에서 2.35:1로 설정해놓고 봐야 정상적인 비율로 나오는데... 그렇게 해놔도 화면 캡쳐는 여전히 이렇게 위아래로 늘어난 그림을 잡아내는군...
곰플레이어에게 실망이다..

아무튼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 벤을 향해 뭐라고 미칠듯이 쏘아대는 수지의 얼굴이다. 그녀의 일그러지는 얼굴과 하트 모양의 어니언링처럼 되버리는 입술 그리고 포물선을 그리며 앞으로 떨어지는 침마저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고속촬영으로 보여진다.

대충 봐서는 초당 48프레임정도로 촬영된 것 같다. 그래서 2배정도로 느리게 플레이되는.. 아무튼 이 효과가 나는 이 영화의 모티브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나면 이 우아한 음악에 깔리는 고속촬영이 너무나도 고요하게 아름다운 사랑의 전반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영국영화의 배경은 참 아름답지 않다. 날씨 때문인지 항상 흐리고 배경은 딱딱하다. 하지만 이 영화 캐쉬백은 아름답다. 그것은 배경의 미쟝센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의 속도 조절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사실 복선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복선이라고 하기보다는 씨뿌리기라고 생각해야겠지만... 아무튼 나중에 벤이 자각하는 능력.. 즉 시간을 멈추고 느리게하거나 빠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수지와의 이별장면에서 부터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벤도 자각하지 못하고 관객역시 단순한 영화적 특수효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영화를 잠식하는 통일된 표현수단. 느린 아름다움의 시작이다.
감독은 이미 이 시점에서 부터 벤이 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의외로 유머스럽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주인공 벤의 표정처럼 조금은 우울하고 정적이지만 의외로 유머스럽다. 특히 이 장면의 몽타주 역시 그렇다.

머그컵에 머리를 맞은후 다시 수지가 던지는 스탠드가 날아오는 장면이 이전보다 훨씬더 고속촬영되어 보여진다. 하지만 그 직후에는 벤이 스탠드에 맞는 장면 대신 그가 흘리는 피에 대한 몽타주가 보여진다. 벤이 자신의 식사에 케찹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머리에 피가 새어나와 흐르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에 이 케찹장면으로 대신한다.
꽤나 유머스럽지 않은가?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을 알면 러시아 혁명이라도 일으키겠지만 현대에는 이렇게 유머스럽게 이용되는 것이 흔하게 볼수 있다. 그냥 다음장면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감독은 이런 재치로 인해 심각한 이별장면에서 심각하지 않은 분위기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사실 이영화에서 벤은 혼자서 심각해 하지만 관객들은 수지와의 이별에 대해서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감독이 의도겠지만...


영화의 첫대사가 너무 좋다.
인간의 두개골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략 500파운드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감정은 훨씬 더 깨지기 쉽다.

유럽식의 서정적인영화 캐쉬백이다.

나도 참 신기할 정도로 무심하다.
이 영화를 보고 타이틀이 불어로 쓰여있는 것을 보고도.. 한참동안이나 영화가 불어로 나오는 것을 보고도 계속해서 프랑스 영화라는 것을 몰랐다.
중간에 너무 미국영화 같지가 않아서...아 영화가 뭐 이리 유럽식이야? 라고 생각하고 보니 아.. 이거 프랑스 말이네... 라고 알아차렸다..

영화의 시작은 줄리앙의 소년시절 목소리로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이런 초스피드로 무빙하는 롱테이크는 거의 회고식 영화에서 쓰인다>

실제로 단 한컷으로 찍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무튼 지금 30초정도의 장면은 단 한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런 롱테이크...
보통의 롱테이크와 달리 이렇게 초고속으로 무빙하면서 중간의 장면들에 멈춰서 보여주는 방식은 이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깔린 회고식 영화에서 주로 보여진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무빙의 이유는 명확하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고 수많은 사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 기억을 더듬어 내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에서 딱 멈춰서 보여준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영화는 예쁜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하지만 이게 줄리앙의 집같지는 않은데.. 위치상..) 운전기사가 없는 버스, 상자, 소피, 그리고 줄리앙이 보여진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장면 직후의 장면으로 알 수 있듯이 사건의 발단은 여기부터가 아니다. 줄리앙의 엄마가 의사로부터 암선고를 받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시작이다. 하지만 어째서 영화는 이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가?

먼저 줄리앙과 엄마의 이야기부터가 아니라 소피와 줄리앙의 만남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영화는 오직 줄리앙와 소피의 관계에 대한 영화다. 그들이 어릴적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마지막까지가 보여지는 영화다. 영화에서 다른 인물 즉, 소피의 언니라던가 줄리앙의 부모님은 조연오브 조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굳이 소피와 줄리앙의 내기가 시작된 이장면에서부터 보여진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줄리앙의 어린목소리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마치 뭔가를 이야기하려다가 '아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이걸 말해야되..'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때문에 이런 식의 설정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좀더 몰입해서 들을 수 있고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인과관계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류의 크레인을 이용한 카메라 무빙. 특히 이 장면처럼 초고속으로 무빙한 장면들은 당연하지만 영화의 리얼리티보다는 동화적인 느낌으로 구성된다. 아멜리에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크레인샷들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우리는 그들의 삶을 하늘에서 무빙하며 볼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장면에서 보여지는 크레인 샷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마치 동화속 이야기처럼 상상속에서 훔쳐보게 해준다.

이 영화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나도 동화적인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감독은 당연히 동화적인 마음과 표현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장르 구분 때문에 이 영화가 로멘틱 코메디로 분류되어 있다는게 너무나 안타깝다. 이 영화는 로멘틱 잔혹극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로멘틱하게 잔혹한가? 이제 슬슬 영화계에서도 장르를 좀더 세분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10년뒤쯤 일어날 것이긴 하지만. 역시 대한민국. 



일본영화인데도 하나와 앨리스에서 아오이 유우의 이름을 앨리스다. 2009/01/05 - [video grammer] - 영상문법 - 카드에 담긴 메타포 <하나와 앨리스>에서 이야기 한대로 그녀의 이름의 이유는 그녀의 캐릭터 설정에 있다.

조제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녀의 이름은 쿠미코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츠네오가 사다준 속편 그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조제'다>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 그녀가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사강'의 속편. 어째서인지 속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리질 않아서 조제는 책을 구할수가 없었다.

츠네오는 서점에 가서 알아본뒤 절판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헌책방에가서 그 책을 구해온다.

<조제는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 가발까지 쓰고 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축구나 야구 중계를 볼때 가끔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는 사람이 있다. 물론 집에서.. 여기에서 조제의 기분이 그런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를 조제라 말하고 여주인공이 '조제'인 책을 읽으며 그녀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책의 주인공처럼 금발머리 가발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어째서 조제는 자신을 조제라 부르고 가발까지 써가면서 책을 읽는가?

<책속의 조제가 가진 여기저기 상처입은 토끼인형을 보자>

츠네오가 처음 조제의 집에 간날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경에 여기저기 꿰매어진 토끼 인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윗사진처럼 조제가 자신을 동일시한 책의 여주인공이 가진 토끼 인형과 똑같다.

아마도 조제는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 하기 위해서 멀쩡한 토끼인형을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조제가 되길 원하는가?

내 개인적인 해석으로 이 책이 너무 훌륭했다거나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어서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조제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절박하고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가 주워온 수많은 책중에서 속편을 도무지 구할 수 없었던 책.

다른 책들은 외울정도로 지겹게 봤지만 속편을 구할수 없었던 조제의 이야기는 스스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속에서 자연스레 쿠미코와 조제를 합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조제라고 불리길 원하고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멀쩡한 토끼인형을 다 떨어져서 헝겊을 덧댄것처럼 해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쿠미코'의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갈망은 아마 츠네오에 대한 마음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내가 얼마전 '큐피드의 장난'이라는 일본 만화책을 봤다. 거기에 보면 남자를 거의 사겨보지 않은 여성이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성관계 이후에 자신이 그저 외로웠을 뿐이고 20살이 되도록 남자한번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자신에게 접근한 주인공을 사랑하게 됐노라고 고백한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사람의 현실은 이렇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맞는 사랑을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조제에게 평생 남자는 없었다. 츠네오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츠네오는 조제가 알게된 첫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녀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지만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란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츠네오를 거부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랑'을 하게된 유일한 사람이다. 조제는 이 가질수 없는 '사랑의 경험'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녀는 츠네오가 언젠가 자신을 떠날 것을 알지만 현재를 살아간다. 츠네오와의 사랑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언젠가 츠네오가 떠날때 까지.

그녀가 가지지 못해서 열망했던 '책의 속편'처럼 츠네오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츠네오는 속편을 구해다줬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조제는 이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버림받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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