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킥애스로 히어로물을 과감하게 비틀어 버린 매튜본 감독의 스파이 영화.

이 작품에서 역시 그는 스파이물이라는 장르를 비틀어 버린다.

 

장르를 파괴할 것이라면 역시 처음부터 해야 제맛.

킥애스에서 히어로로 보이는 정신병자가 추락사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처럼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 살펴 보자.

 

 

<영화는 카세트테잎이 돌아가는 이미지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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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카세트 테잎이 돌아가는 이미지로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카메라가 빠져서 날아가는 헬기를 따라가다가 결국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킹스맨들이 있는 건물 안까지 단 한 컷으로 보여준다.

 

게임 영상같기도 하고 화려하고 재미난 이 쇼트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009/09/13 - [영상문법] - 영화시작의 메타포 - <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

2016/05/30 - [영상문법] - [영상문법] 영화의 시작과 끝 - 건축학개론, 2012

2011/08/12 - [영상문법] - 시치미 떼며 시작하기 <모짜르트와 고래 : Mozart And The Whale, 2005>

2009/09/13 - [영상문법] - 영화의 시작 - <귀 없는 토끼, Rabbit without ears>

 

링크한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영화의 시작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관객이 처음 만나는 이미지 처음 만나는 사건 그것을 어느 시점에 어떤 각도로 누구의 관점으로 보여줄 것인가?

 

영화의 시작을 선택하는 것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 킹스맨의 첫 씬 자체는 아주 납득이 가는 방식이다.

주인공 에그시가 이후에 겪어야할 이야기의 전사가 펼쳐지는 것이며 이 영화의 배경 스토리가 되는 중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이 왜 하필 엑스트라들이 듣고 있는 오디오의 카세트테잎 이미지인 것인가? 누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이 카세트테잎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에서 의미가 전혀 없다.

그럴리가 있나? 영화를 처음 만드는 초짜 감독도 아니고 매튜본이 그럴리가... 그리고 이 영화의 전반적 쇼트들을 보더라도 감독이 아무 생각 없이 이 장면을 넣었을리는 없다.

단지 의도적으로 아무의미 없는 카세트테잎으로 부터 시작한 것이다.

 

왜냐고? 이 영화는 장르를 비트는 영화니까.

장르영화를 포함해 모든 영화에서 일컬어지는 영화의 첫 이미지의 미덕을 지키지 않는 것이야 말로 뒤틀기의 미덕이니까.

 

맥거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영화에서 만약 총이 나온다면 그 총은 영화 안에서 반드시 쏘아져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쏘아지지 않을 총이라는게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므로...

하지만 스릴러의 아버지인 히치콕 감독이 이 이론에 빅엿을 먹인다. 맥거핀 이론으로...

 

영화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쏘아져야 한다고? 그럼 관객이 그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러므로 쏘아지지 않아도 의미가 생긴다. 바로 훼이크라는 명목으로...

히치콕 감독은 이런식으로 의미 없는 장면을 영화 초반에 배치하여 관객을 혼란시켰다.

범인이 아닌데도 범인처럼 보여지는 은밀한 장면들이라거나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전조의 느낌을 주는 장면이라거나...

 

킹스맨의 첫번째 카세트테잎도 비슷하게 해석되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첫번째 이미지가 의미있어야 한다고? 그건 장르영화에서 늘 그렇게 해왔지.

그런데 맨날 똑같이 만드는건 지겹잖아. 그러니까 빅엿을 선사하지.

이게 매튜본 감독의 생각이 아닐까?

 

그렇지만 매튜본 감독은 내공이 보통이 아니므로 혼자서는 아무의미 없는 이 카세트테잎의 이미지를 마지막 씬과 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 역시 아무의미 없는 카세트테잎이 또 들어간다>

 

 

모든 사건이 끝난듯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다.

매튜본 감독이 만든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스파이물과 다르니까.

 

원래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 예를들어 007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고민이 없다. 평화를 지키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없으며 가족같은 자신의 약점이 될만한 약한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장 큰 목적은 크나큰 소명과 자신의 성공이다.

 

하지만 에그시는 좀 다르다.

그는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인생에서 실패해온 실패자이며 그가 킹스맨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전으로 가족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이것이 에그시가 이루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 '임무'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나온 카세트테잎의 이미지로 부터 어긋난 에그시 가족의 운명이 같은 이미지로 시작된 마지막 씬에서 마침내 제 궤도로 돌아온다.

 

마지막 씬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똑같이 악당들에게 돌려주며 자신의 최후의 임무를 수행하는 에그시가 멋진 이유가 무엇인가?

이 장면이야 말로 에그시가, 그리고 그에게 이입된 관객들이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박혀있던 가시를 빼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렇게 통쾌하고 신나는 것이다. 물론 액션도 쿨하고 멋있게 찍었지만.

의미없는 액션은 그저 허세에 불과하지 않는가?

 

영화의 첫번째 컷을 의미있게 찍으라는 법칙을 무시하기 위해 카세트테잎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에 다시 자신만의 작법으로 의미를 부여한 매튜본 감독의 연출력이 사실 좀 놀라웠다.

 

우리가 흔히 사극이라 부르는 역사극은 당연하거니와 지금 시대를 조금 거슬러 올라간 시대극에도 당시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남의 이야기도 마치 내가 본 풍경처럼 느껴지는 것.

 

 

 

옷차림은 오히려 주연급 배우들은 무난하다. 부자 선배야 워낙 명품을 입으니 시대를 안탄다 치지만 주인공 승민은 오히려 멋을 부리지 않아서일까?

오히려 같은과 친구보다 세련된 느낌이 든다.

 

 

 

코미디 영화가 아닌이상 주인공의 복장을 90년대 에쵸티 젝스키스 풍으로 할순 없지만 친구라면 다르다.

이 영화에서 납득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언행뿐 아니라 그 시대를 느끼며 웃음짓게 만드는 패션 센스에 있다.

 

깨알 같지만 두번째 사진 왼쪽에 붙은 비디오가게의 포스터를 보자 자세히 보면 브루스 윌리스라는 한글로 적힌 이름과 옛날 영화들이 잔뜩 붙어 있다.

 

이 영화는 이런식의 디테일한 부분을 꽤나 신경쓰고 있다. 이것은 물론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역시 주연 남녀의 패션은 지금의 대학생이라고 봐도 (촌스럽나?) 그건 아닌가?

아무튼 그래도 일단 확실히 완벽한 시대고증적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너무 촌스러우면 관객들이 오히려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두꺼비 소주와 대학교에 붙은 pc통신 무료강좌 후덜덜하다.

 

사실 이런류의 영화가 해야할 당연한 일이고 더구나 건축학개론이라는 제목인 만큼 주변 풍경에 많이 신경 쓴 모습이 보인다.

 

수지와 뒤에 선배가 입은 폴라티... 저런거 요새 안입잖음? 스티브 잡스형이 입던 스탈아님?

 

물론 영화에 따라서 이런 고증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이다.

완벽하게 똑같이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아니면 어느정도 판타지를 유지해 주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며 건축학개론은 꽤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납득이 같은 패션을 입은 승민과 S.E.S같은 패션과 염색머리 수지는 좀 아니지 않는가?

 

정확한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어느정도 판타지로 채운 것인지 궁금해진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이것은 시나리오의 문제와는 다르다. 시나리오의 그것이 이야기의 문제라면 영화는 이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것은 이런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 훌륭한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포스팅을 시작으로 영화 건축학개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씬은 굳이 필요한가?>

 

 

위의 장면이 건축학개론의 이른바 오프닝시퀀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재밌게 본 관객이 과연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 장면이 영화에서 꼭 필요할까? 라고 묻는 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장면은 왜 필요한지. 영화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 보자.

 

먼저 이 씬을 요약하면 어른이 된 양서연이 공사하다가 중지된 부모님의 집을 둘러본다.

그리고 지저분한 거실 바닥에 시멘트가 놓여있는 것과는 대조되게 그녀의 방(으로 추정되지?)은 마치 며칠전까지 사용하고 있었던 것 처럼 깨끗하다.

그리고 집을 살펴본 그녀가 떠나고 집의 외관이 멀리서 보이고 타이틀이 들어간다.

 

대사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이 장면이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재미있어 했을리가 없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장면을 나열하는 영화를 좋아해줄 정도로 대중은 멍청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사중인 집은 바로 현재의 양서연이다.

원래 영화에서 '집'이란 그 인물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내면이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느낌의 집에서 살 것이고 성공만을 바라며 냉철하게 살아온 사람의 집은 그것과 다를 것이다.

 

이 집은 양서연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부숴져있다.

영화의 시작지점에 그녀의 상태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는 아프고 꿈을 포기하고 했던 결혼은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그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친구였던 승민을 기억하고 찾아간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갑자기 승민을 떠올린 걸까?

그가 건축과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공사를 처음부터 그에게 맡겨도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고 정확히 무슨 이유로 승민을 떠올렸는지는 보여지지 않지만 이 집에서 혼자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된 방이 있다.

이 방이야 말로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고 서연은 자신의 옛 집을 둘러보다가 바로 그 방의 문을 열어본다. 방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그 때의 기억을 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방에 들어가보지는 않지만 이 방을 열어 보았다는 것이 승민을 떠올렸다고 생각된다.

 

뻥 뚫려있는 문을 통해 집으로는 들어가지만 닫혀 있던 자신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저 들여다 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위해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기억을 마주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어째서 이 방만 그때 그대로인가?

영화적 리얼리티로는 말도 안되는 책상에 포스트잍이 그대로 붙어 있는...

 

서연의 다른 삶은 그 이후로도 진행 되었고 그로 인해 좋던 나쁘던 변화했지만 승민과의 기억은 그 때 그대로 멈춰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때문에 그녀는 승민을 찾아갔고 자신이 인생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그와의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리고 서연은 집과 자신을 리모델링 시킨다>

 

 

이렇게 처음과 끝을 비교해보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제법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다.

엉망이었던 서연의 삶과 집이 원하는대로 예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혼을 했고 아픈 아버지를 모시며 살 수 있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집 역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영화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피아노 과외를 하는 장면을 보면 정확하게 맥락이 짚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승민이 보내온 택배를 받는다.

서연이 두고간 그것을 승민이 보내옴으로써 둘사이의 이야기가 모두 맞춰진다.

 

과거에 서연에게 그 선배가 없었다면 둘이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것처럼 현재 승민에게 약혼자가 없었다면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것이 이 둘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카메라는 오랜만에 씨디를 재생하며 음악을 듣는 서연을 비춰주다가 결국 그녀에게서 떠난다.

그녀의 삶이 안정됐다는걸 확인 시켜주고 승민에게서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관객에게도 그녀를 이제는 잊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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